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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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숲 지기 2022. 4. 16. 05:53

봄밤

/ 권혁웅 ​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 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 권혁웅,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창비, 2013)

 

 

............................

 

 

시를 읽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 봄이고,

봄 중에도 

밤이 그 클라이막스이다. 

나는 코로나를 앓으며 냄새 감각을 상실하여 아주 느릿느릿 회복 중인데 

아이가 엄마 젖냄새를 알아내듯 

이 봄이 새롭고 

이 대지가 새롭다. 

 

권혁웅씨의 이런 시가 있을 줄 몰랐다.

그의 시를 대할 때마다 너무 인위적인 어긋남에 피곤했었는데 

이 시에 놀랍고 반갑다. 

 

 

 

 

*사진의 모델은 내 텃밭의 사과꽃들

 

 

  • Chris2022.04.16 00:56 신고

    슬픈 시입니다.
    시를 잘 몰라서 하는 애긴데,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슬프면 그저 슬프다고 하면 되나요
    아니면 그 슬픔 속에서 어떤 미를 찾을 수 있어야하나요?

    저도 최근 오미크론(?) 걸렸다가 한 10일 앓고 나서 좋아졌는데
    조금 더디게 회복되시나보죠?
    봄 냄새 맡는 것을 보니 많이 좋아지신 모양입니다. ㅎ

    답글
    • 숲지기2022.04.21 13:46

      크리스님, 많이 아프셨습니까?
      지금쯤은 말끔하게 다 나으셨기를 바랍니다.
      써주신 댓글, 며칠 전에 읽었지만
      명절치레 하느라 분주했었습니다.

      기쁠 땐 시 같은 건 읽을 틈이 없을 겁니다.
      뭔가 덜 채워진 듯, 혹은 텅 빈 듯 할 때
      시가 그 빈 곳을 위로하고 채우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Chris2022.04.21 15:02 신고

      10일 정도 지나서 음성 나오고 나았는데, 지금까지 목이 조금 갈갈하네요. 롱 코비드는 아닌 것 같지만, 불편함이 100% 가신 것은 아닙니다.
      천연 항체 얻었다고 자위하지만, 변종들이 자꾸나오니 4차 부스터 샷 맞는 것을 고민 중입니다.
      일년 내내 주사 맞고 살아야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 인간들 머리 좋으니, 언젠가 한방으로 싹~ 평정하는 날이 올지도...
      예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성격상 시는 좀 안맞는 것 같습니다. 한참 생각해야 맛이 우러나오는 것 보다는, 당장 "너는 나쁜 놈, 너는 좋은 놈" 해야 직성이 풀리니, 얕은 인식 수준의 소유자인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하네요.

    • 숲지기2022.04.21 23:39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해오셔서 빨리 나으셨나 봅니다.
      축하드립니다.
      제 독일인 지인 중엔 다 낫고도 2달 동안 기침 중인 경우도 있습니다.
      코비19에 대해 워낙 중구난방 "썰"이 많아서
      믿을 게 어떤 것인지 찾아보는 것조차 저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크리스님의 시에 관한 견해, 이해합니다.
      시를 어렵게 쓰는 생산자들 즉 시인들의 책임도 있을 것이고요.


  • 이쁜준서2022.04.16 01:00 신고

    사과나무꽃이지 싶은데,
    아직 추워서 밤이면 오들오들 떨면서 지내고
    아침 햇살이 나고 낮에는 다 펴지도 못하고 피었던 꽃잎이
    시간이 지나면서 펴 지는 꽃샘추위 그 때의 봄 모습입니다.
    사과가 참 많이 달렸던 그 나무일까?

    코로나를 심하게 앓으시고 휴증이 어디 냄새 맡는 것만 둔해졌겠습니까?
    서 있어도 다리에도 힘이 없으셨을 것이고, 조금씩 텃밭과 정원일 하셔요.
    조금씩 드디게라도 회복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 적다보니 텃밭의 사과꽃이란 설명이 보입니다.

    답글
    • 숲지기2022.04.21 13:53

      사과나무꽃 맞습니다.
      저렇게 환하게 피었다가
      며칠 영하 기온을 겪더니 그냥 다 떨어졌습니다.
      매년 이맘때 꽃 피우는 연습을 했을텐데도
      여전히 때 맞추기는 어려운가 보구나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후유증이 꽤 오래 갑니다.
      운전 중에도 깜박하고 어딜 가고 있지? 그러고 되묻고요,
      잘 넘어지기도 합니다.
      냄새맡는 감각은, 아주 심한 냄새가 아니면 코가 깜깜합니다.
      되돌아올지 잘 모르지만
      이만한 불편은 안고 살아라고 하는 것 같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 파란편지2022.04.16 08:45 신고

    사과꽃은 사과처럼 아름답군요.
    그러니까 사과가 열리는 것이겠지요?

    '봄밤'
    저 사내가, 젊었던 날, A시라고 할까요? 거기 살 때의 저 같구나 했습니다.
    아주 취해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동네 입구에 내려놓고 가버렸습니다.
    제가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어서 횡설수설했겠지요?
    그 달밤, 냇가 둑에 누워 있었는데 야경꾼 둘이 다가와서 "아저씨!" "아저씨!" 부르는 소리는 들은 것 같았고
    새벽에 일어나 비로소 어디가 어딘지 어렴풋이 알아차리게 되어 집으로 들어갔는데
    제가 가진 거라고는 입고 있는 옷가지와 두 알이 다 빠져버린 안경테뿐이었습니다.
    며칠 후 파출소에서 연락이 와서 갔더니 주민증이 거기 돌아와 있더라고요. ㅎ~

    답글
    • 숲지기2022.04.21 14:00

      교장선생님의 사실적인 경험담, 재미있게 읽습니다.
      며칠 전에 읽고서도 웃고요, 지금 읽고도 웃음이 나옵니다 ㅋㅋ
      교장선생님을 좀은 안다고 여겼나 봅니다,
      너무나 엉뚱하신 하하...
      안경알까지 ㅋㅋㅋ

      저는 술 취한 기억이 없습니다.
      와인 한잔 마시고 '좀 야릇하다'는 정도 뿐입니다.
      담배도 핀 적이 없습니다.
      해 본 것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이 웃고 있으니
      교장선생님께서 이해해 주십시오.

    • 파란편지2022.04.21 15:35 신고

      아, 그 안경알은 택시 기사나 야경꾼이나 아니면 지나가던 사람 중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닙니다^^
      안경알은 제가 어디서 빼버렸거나 깨트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안경을 써야 한다는 의식으로 알 빠진 그것을 움켜쥐고 들어갔습니다.

      담배는 일찍 피워야 하니까 이제 숲지기님은 피워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피우려면 저처럼 일찌감치 그러니까 약 47년간쯤 피우고 병이 들어 중환자실에 들어가 인사불성이 되면 금단현상 겪지 않고 끊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는 더러 피워보는 그리운 벗이었습니다.

    • 숲지기2022.04.21 23:27

      써주신 댓글을 읽고
      텃밭에 나가 감자를 심었는데
      교장선생님의 안경알생각으로 웃다가
      한 구멍에 감자 두알을 넣곤 했습니다.
      원래는 한 개만 넣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하

      고국을 떠나기 전에 할 만한 것을 좀 해볼 걸 그랬습니다.
      해외살이 중엔, 얼굴에 한국인이라는 것이 써 있어서
      우리나라 욕먹이면 안 되니 못하죠.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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