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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10)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저기 동백이 오고 있다/정일근 얼음이 꽝꽝 어는 정월 추위 속에 온다방울토마토 크기만 한 동백 꽃송이빨간 입술 감싸듯 내밀며 온다그 속에 대여섯 장의 꽃잎으로 온다흰색 수술 노란 꽃밥 감추며 은근슬쩍 온다엄동에 활짝 피어나겨울 동冬을 이겨 꽃이 되기 위해 온다그러다 소문이 사실인 듯 활짝 피어날 것이니위대한 겨울의 꽃, 동백이 오고 있다저기 화려하게 지기 위해 동백이 온다. 새옷 입고 / 문정희새해에는 새옷 하나지어 입을까보다하늘에서 목욕 나온 선녀들처럼헌옷은 훌훌 벗어버리고가쁜한 알몸 위에새옷 하나 갈아입을까보다내가 사는 숲속에는 가시가 많아그 가시에 찢기워 상처 많은 옷흔해빠진 고독이제는 훌훌 벗어버리고새해에는새옷 입고 새로 사랑할까보다가만히 있어도하늘이 가득 차오르는우물 같은 사람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기차역에서 울어본 적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영원을 붙잡았던 적 사랑의 불가능/고영민 나무는 잎을 지웠다이제 새를 모을 방법이란 무엇일까시효가 있는 걸까사람에게도 불이 붙지 않는 재와 같이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이 일생을 다하고 폭발하는 별과 같이울지 않는 새와 같이새가 없는 하늘같이 나의 날은 베..
우체국을 지나며 / 문무학살아가며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가을날 우체국 근처 그쯤이면 좋겠다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우체국 앞만 한 곳 없다우체통이 보이면 그냥 소식 궁금하고써놓은 편지 없어도 우표를 사고 싶다그대가 그립다고 그립다고 그립다고우체통 앞에 서서 부르고 또 부르면그 사람 사는 곳까지 전해질 것만 같고길 건너 빌딩 앞 플라타너스 이파리는언젠가 내게로 왔던 해 묵은 엽서 한 장그 사연 먼 길 돌아와 발끝에 버석거린다물 다 든 가로수 이파리처럼 나 세상에 붙어잔바람에 간당대며 매달려 있지만그래도 그리움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9월호 서귀포 소녀/김륭 비는 계속된다그대로 두면 또 울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소녀..
준비 - 열애 일기 4/ 한승원산 단풍의 색깔은 조금씩 진해지는 것이 아니고어느 하룻밤의 찬서리와 함께 갑자기 새빨개지고 샛노랗게 된다고 산에 사는 젊은 비구니 스님이 그랬습니다낙엽은 한 잎 두 잎씩 지는 게 아니고어느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 담벽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산에 사는 늙은 스님이 그랬습니다나는 날마다 준비합니다사랑하는 당신께 가노라는 말도 못 하고 어느 하룻밤 사이에 단풍처럼 진해졌다가 담벽 무너지듯 떨어져갈 그 준비- 한승원, 『열애일기』(문학과지성사, 1995) 저 별빛 / 강연호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깻대를 베는 시간/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조금 애처롭게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
가시/ 정호승지은 죄가 많아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손등에는 채송화가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장미는 시들지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슬며시 그만두었다-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장마 / 안상학세상 살기 힘든 날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강가에 나가..
감자꽃 필 무렵 / 허림 아날로그 시계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고 있다감자꽃이 피었다내면 광원 월둔 골짜기안개 풀리면서땅 속 감자가 여무는 동안안부 편지 한 줄 쓰지 못했다산그늘 먹물로 풀리는그날 저녁밥은 먹고 사냐는 문자를 받았다- '말 주머니' 북인, 2014 가난한 풍경 / 조동례외롭다는 이유로세상 등지고 싶은 사람 하나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건그도 배고프고 나도 배고팠던 것세상을 등진 그가나에게 한 발짝 다가오면벼랑을 등지고 사는 나물러설 곳이 벼랑이어서벼랑이 한 발짝 가까워지는데아는지 모르는지간절하고 절박한 마음 하나로물러설 곳도 나아갈 곳도 잊고주머니에서 풀씨 몇 개비상금처럼 털어내고 있다하마터면 나도 외롭다는 말을탈탈 털어놓을 뻔했다- 조동례,『달을 가리키던 손가락 』(삶창, 2013..
이슬/이기철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저 순결에 도달할 수 있었다아무 것도 먹은 맘 없었으므로저 순결에 도달할 수 있었다나락이 어딘 줄 모르므로 공중에 매달릴 수 있었다누굴 한 번 지독히 사랑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었으므로저리도 투명한 몸일 수 있었다숨어서 지내는 일생이 전부인 물방울피마저 하얘서 물방울인 이슬가시에 찔리면 제 피를 어디에 잠궈 두나 산에 사는 작은 새여 / 장석남감꽃이 나왔다신문을 접고 감꽃을 본다참 먼 길을 온 거다벽에 걸린 달력 옛그림엔 말 씻는 늙은이 진지하고살찐 말은 지그시 눈 감았다어디서 나비라도 한 마리 날아와라날아와서 말 끌고 가라성밖 막다른 골목 어귀에 자리 잡고 살지만번거롭다, 밥이나 먹고 사는 일이야 간단할 것인데이 눈치 저 눈치 며칠째 이 小市民을..
봄비 / 배한봉당신은 새 잎사귀의 걸음으로 내게 들어왔다하늘에서 대지로 조용조용 속삭이며 노크하던당신의 발자국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고피가 돌아 세계의 상처에 살이 차올랐고구름의 눈썹 아래로 휴가 떠난 태양의 안부가 궁금했지만간절했던 것들은 간절하게 자라서척박한 페이지에 초록빛 문장을 새겨 넣었다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면 그새 새로 출간된날개가 내 겨드랑이에서 언뜻 보였다투명한 잎사귀의 걸음으로 당신이 내게 들어올 때나뭇가지 안에 갇혀 신음하던 그 춥고 아픈,간절한 것들이 찍어놓은 푸른 바코드젖은 말들이 도처에서 재잘대며 걸어 나오고 있다당신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달려 나오고 있다- 배한봉 '주남지의 새들' 천년의시작 2017 라일락 / 허수경라일락어떡하지,이 봄을 아리게살아버리려면?신나..
벚꽃 반쯤 떨어지고 / 황인숙 한 소절 비가 내리고 바람 불고 벚꽃나무 심장이 구석구석 뛰고 두근거림이 흩날리는 공원 소롯길 환하게 열린 배경을 한 여인네가 틀어막고 있다 엉덩이 옆에 놓인 배낭만 한 온몸을 컴컴하게 웅크리고 고단하고 옅은 잠에 들어 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반쯤 나뭇가지에 멈추고. - 황인숙 '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사 2003 눈빛으로 말하다 / 나호열 떠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기다려 보지 않은 사람에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잔뜩 움켜쥐었다가 제풀에 놓아 버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독약 같은 그리움은 찾아오지 않는다 달빛을 담아 봉한 항아리를 가슴에 묻어 놓고 평생 말문을 닫은 사람 눈빛으로 보고 눈빛으로 듣는다 그리움은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꽃 그저 멀기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