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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15)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함박꽃 여자 / 정영선나 모레 이사 가. 어디로 왜 가느냐는 다그침에 이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라며 전화선처럼 늘어진 목소리로 담담함을 그려낸다. 철렁 심장이 곤두박질치다가 이내 먹먹함으로 돌아선다. 서너 해 전 남편이 종종걸음으로 하늘길 떠난 후 애들마저 직장 따라 객지로 떠나자 부초 같은 마음 매어둘 곳 없어 바다가 보이는 고향으로 내려간단다. 우리 걷는 길에 늘 이별을 예견하고 살지만 갑작스러운 그녀의 이별 통보는 가슴에 왕소금을 뿌린 듯하다. 말할 때 늘 함박웃음 먼저 피워 무는, 가슴엔 노을빛 물무늬 잘랑대고 뉘게나 하늘사랑을 한 됫박씩 퍼다 나르는 차마 보기 드문 여자, 내 안에 심어진 함박꽃 한 그루 뿌리째 스러진다. 와르르 무너지는 아픈 사랑 같은, 어딜 가나 그 입가 함박꽃 물고..

독일 어느 동네 한복판에 세워진 오월의 나무* 지금은 어떤 음악 속에 / 문태준오늘은 밝고 고요한 흰 빛이 내리시니화분에 물을 부어주고멀리 가 있는 딸의 빈방을 들여다본다일곱살 딸이 작은 방에서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다그래, 지금은 어떤 음악 속에 있다뒷숲에는 잎들이 지고거실에는 어제의 식구들이 수런거리고탁자 위 돌, 조개껍질, 인형은 눈을 감고나는 씌어지지 않은 백지를,백지의 빛을 책상 위에 가만히 펼친다문장이 백지 위에 어리고 움직인다희미하고 물렁물렁한 감정을 갖고서내 옆에는 한 컵의 투명한 물이 있고그 옆에는 허물어진 그림자가 있고노랗게 익은 모과는 향기를 풀어내고때때로 떨어진 잎들의 흐느낌이 들려온다누군가 문밖에서 나를 불러흰 빛 속에 잠시 나를 들어올린다-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

만월 滿月 단청丹靑/정일근산은 하늘 주인이 내려와 사는 천황산인데남루하여 새 단청 입지 못하는 산절이 있다사월 보름달 새벽에 찾아오시면, 절은벌떡 일어나 제 남루한 알몸 천천히 돌려 가며한 홉 한 작 남김없이 꼼꼼하게 색을 받는다 달빛이 비단 금비단을 짜서 툭, 던져 놓고어허 꽃이로다 꽃! 제 이마 탁, 치는 밤에우주의 별이 일제히 눈을 감는다 천하절색이라는 말 이 절색에서 나왔으리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만월의 단청불사인데달이 돌아가실 때 절이 오체투지로 올리는 사례는만개한 때죽나무 꽃내음이 전부다. 또 다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최영미불꺼진 방마다 머뭇거리며, 거울은 주름살 새로 만들고멀리 있어도 비릿한, 냄새를 맡는다기지개 켜는 정충들 발아하는 새싹의 비명무덤가의 흙들도 어깨 들썩..

파랑의 감각/김개미파란색이 차갑다 생각하지 않아요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고차갑다 생각한 적 없어요어려서 그렇게 배웠다고커서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은내 생각이 아니죠골목 깊은 곳의 파란 대문은동네에서 제일 예쁜 파란색파란 나라 파란 몸 스머프는내가 제일 아끼는 파란색파란색은 백 가지도 천 가지도 넘어요어떤 파란색은 꿈속에만 있고어떤 파란색은 어떤 사람에게만 있고어떤 파란색은 저녁에만 있어요아직 아무도 본 적 없는 파란색도 있어요얼마나 많은 파란색이 발견될지누가 발견할지 나는 너무 궁금해요물감 뚜껑을 닫는 순간나와 당신의 파란색은더 이상 같은 색이 아니죠나는 내 마음속의 파란색을당신은 당신 마음속의 파란색을 볼 뿐이죠화가들은 자신만의 파란색을 가지려고일평생 색깔 속으로 떠나죠노..

'이미'라는 말/김승희 이미라는 말,그런 것이다언제 찬란했냐는 듯겨울 눈송이가 다 스며들었다는 말이다아마 그럴 것이다 공중에 뜬 리프트 상태에서 추락해 전신에 부상을 입은 발레리나,노을이 가슴에 내려와한사발 가득 목울대를 채우던 울음,언제 찬란했냐는 듯빈 사발에 쓸쓸한 물빛만 맴돌고벌써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기장처럼 뻥뻥 뚫린 가슴 안에 모기는 이미 들어와 있다,움직일 때마다 모기소리가 식식거리는 흉곽,어차피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얼어붙은 가슴팍 밑으로 이미,터무니 없는,언제 찬란했냐는 듯그런데봄눈녹아복수초부터 수선화 유채꽃 노루귀 한계령풀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개나리 진달래줄을 이어 꽃잔치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덜어내고도 다시 고이는 힘!이미란 말이다 -'흰 나무 아래의 즉흥', 나남, 2014 ..

저기 동백이 오고 있다/정일근 얼음이 꽝꽝 어는 정월 추위 속에 온다방울토마토 크기만 한 동백 꽃송이빨간 입술 감싸듯 내밀며 온다그 속에 대여섯 장의 꽃잎으로 온다흰색 수술 노란 꽃밥 감추며 은근슬쩍 온다엄동에 활짝 피어나겨울 동冬을 이겨 꽃이 되기 위해 온다그러다 소문이 사실인 듯 활짝 피어날 것이니위대한 겨울의 꽃, 동백이 오고 있다저기 화려하게 지기 위해 동백이 온다. 새옷 입고 / 문정희새해에는 새옷 하나지어 입을까보다하늘에서 목욕 나온 선녀들처럼헌옷은 훌훌 벗어버리고가쁜한 알몸 위에새옷 하나 갈아입을까보다내가 사는 숲속에는 가시가 많아그 가시에 찢기워 상처 많은 옷흔해빠진 고독이제는 훌훌 벗어버리고새해에는새옷 입고 새로 사랑할까보다가만히 있어도하늘이 가득 차오르는우물 같은 사람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기차역에서 울어본 적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영원을 붙잡았던 적 사랑의 불가능/고영민 나무는 잎을 지웠다이제 새를 모을 방법이란 무엇일까시효가 있는 걸까사람에게도 불이 붙지 않는 재와 같이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이 일생을 다하고 폭발하는 별과 같이울지 않는 새와 같이새가 없는 하늘같이 나의 날은 베..

우체국을 지나며 / 문무학살아가며 꼭 한번은 만나고 싶은 사람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날 수 있다면가을날 우체국 근처 그쯤이면 좋겠다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엔 우체국 앞만 한 곳 없다우체통이 보이면 그냥 소식 궁금하고써놓은 편지 없어도 우표를 사고 싶다그대가 그립다고 그립다고 그립다고우체통 앞에 서서 부르고 또 부르면그 사람 사는 곳까지 전해질 것만 같고길 건너 빌딩 앞 플라타너스 이파리는언젠가 내게로 왔던 해 묵은 엽서 한 장그 사연 먼 길 돌아와 발끝에 버석거린다물 다 든 가로수 이파리처럼 나 세상에 붙어잔바람에 간당대며 매달려 있지만그래도 그리움 없이야 어이 살 수 있으랴- '공정한시인의사회', 2024년 9월호 서귀포 소녀/김륭 비는 계속된다그대로 두면 또 울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소녀..

준비 - 열애 일기 4/ 한승원산 단풍의 색깔은 조금씩 진해지는 것이 아니고어느 하룻밤의 찬서리와 함께 갑자기 새빨개지고 샛노랗게 된다고 산에 사는 젊은 비구니 스님이 그랬습니다낙엽은 한 잎 두 잎씩 지는 게 아니고어느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 담벽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산에 사는 늙은 스님이 그랬습니다나는 날마다 준비합니다사랑하는 당신께 가노라는 말도 못 하고 어느 하룻밤 사이에 단풍처럼 진해졌다가 담벽 무너지듯 떨어져갈 그 준비- 한승원, 『열애일기』(문학과지성사, 1995) 저 별빛 / 강연호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깻대를 베는 시간/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조금 애처롭게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