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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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4. 9. 1. 21:12

 

 

깻대를 베는 시간

/고영민

 

깻대는 이슬이 걷히기 전에 베는 법
잘 벼린 낫으로 비스듬히 스윽, 당겨 베는 법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무정한 생각이 일기 전
밤이 다 가시기전, 명백한 낮빛이 다 오기 전
조금 애처롭게
슬픔의 자리를 옮겨놓듯 천천히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밥을 먹기 전의 시간
곤한 숨소리가 남아있어 세상이 아직은 순정해져 있을 때
쓸쓸하게 낫에 베이는 깻대여
하지만 이슬은 사라지고 마는 것
깻대를 베는 것은 어쩜 내 안에 와 있는 당신을 가르는 것과 같아서
가만히 와서 가만히 가는 것을 일부러 가르는 것과 같아서
터지는 슬픔 같은 것이어서

깻대는 마음 축축하게 베는 것이라고 당신은 말했네
이 밭에 첫 모를 옮길 때를 생각하며
그늘 속에 잠든 당신을 탁탁탁 두드려 털 때를 생각하며
싸락싸락 깨알이 바닥에 쏟아질 때를 생각하며
덜 아프게 덜 아프게 베는 법이라고 말했네

아침 햇살이 큰 수레를 끌고 와 비로소 한 계절 가만히 저물다간 것들을 옮겨 싣고
깻대를 베는 것은
여기 있는 나와 저만큼의 당신 같은 것이어서
베인 깻대를 묶어 밭가에 세워두는 일은
이슬이 걷히기 전,
꼭 그 때에 해야 하는 것이라 당신은 간곡히 말하고



 

 



 

감사하다

/정호승

 

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나 왕벚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둥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기라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는 쓰러지지 않았다

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뜨리고 고요했다

지어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풀잎 같이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까닭을

그제서야 알고 감사하며 길을 걸었다.

 

 

 

 



.................

 

 

..... 시 '깻대를 베는 시간'은 적어도 15년 전에 여러 번 읽었던 시이다.

깻대와 사람에게 와버린 가을을, 

습기 있을 때 베야하는 깻대의 서정으로 말하고 있다.

시를 읽고서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남는 그 무엇,

이게 슬픔이구나 싶다. 

 

..... 지난 주 내내 밤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졌었는데,

다행히 되돌아 왔다 제대로 된 여름이...

33도까지 기온이 올랐던 오늘은 

릴케가 그의 시 '가을 날'에서 단 이틀만 달라고 기도했던 '남녘의 뜨거운 햇볕'의 축복이 종일 있었다.

여름에 살면서도 나는 여름이 좋다. 

작은 별의 석양 보기를 좋아했던 어린왕자가 석양각도로 의자를 옮겨 앉았던 것처럼 

이곳에 겨울이 들면 여름나라를 찾아 보아야 겠다.

 

..... 텃밭에 잡종이 더러 생겨난다.

고프리카 혹은 파추라고 여기는 게 그것들인데

고추와 파프리카가 서로 정분이 나서 생겨난 종이다.

부언을 하자면 고추의 매운 맛을 바짝 따라잡을 만큼 매콤한 파프리카가 있고

상큼한 파프리카의 맛을 닮은, 전혀 맵지 않은 고추도 있다.

그런가 하면 한 10여 년전 두어 해 파종했던 꽈리고추가 그 동안 열성 DNA로 후손고추에 머물다가 

올해 버젓이 나와 내 밭에서 자라고 있다.

꽈리고추는 일반고추에 비해 표면이 구겨진 편지봉투같다.

 

..... 사진들은 지난 휴가때 블랙포러스트 즉 흑림 숲과 계곡을 걸었을 때 풍경.

더 정확히는 숲속 여름폭포를 찾아가는 길의 도랑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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