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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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4. 8. 2. 00:46

 

 

 

 

가시
/ 정호승

지은 죄가 많아
흠뻑 비를 맞고 봉은사에 갔더니
내 몸에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손등에는 채송화가
무릎에는 제비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야윈 내 젖가슴에는 장미가 피어나
뚝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장미는 꽃에서 향기가 나는 게 아니라
가시에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서 가장 멀리 가는 향기가 난다고
장미는 시들지 않고 자꾸자꾸 피어나
나는 봉은사 대웅전 처마 밑에 앉아
평생토록 내 가슴에 피눈물을 흘리게 한
가시를 힘껏 뽑아내려고 하다가
슬며시 그만두었다

-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4

 

 

 



 

장마 
/ 안상학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흘러 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 안상학 '오래된 엽서' 천년의시작, 2003

 

 

 

 

 

 

한여름 밤의 꿈

/강인한

 

청춘은 슬프다.

 

그렇다, 이 땅의 청춘은

스무 살의 슬픔을 어깨에 삐뚜름하게 걸치고

터벅터벅 맹장 같은 밤의 골목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보안등이 만든 그림자

소주병은 깨져서 담장 위에 칼날이 될 때

 

모든 그림자가 육체를 지우고 육체를 버리고

여름 날의 대지로 스며드는 시각

자귀나무는 붉은 영혼을 살며시 뜨고

분홍의 부채를 활짝 펴든다

 

 

저 , 저 눈부신 절정에서 피는 황홀

중모리 중중모리

휘모리장단으로 치닫는 황홀한 질주

 

삼십리 밖 사람의 마을로 향하는

골짜기 서두르는 여울을 내려다보며

숲속의 자귀나무는 웃는다,눈으로 묻는다.

 

죽음의 비밀을 머금은 입술 오므리듯

잎잎 다물어 포갠다

데칼코마니로 어깨를 걷는 혼령들의 여행

그대,나와 함께 영원의 이파리,초로빛 작은 선실에

즐거이,감쪽같이 ,갇히고 싶지 않은가

 

한줄기 차가운 별빛이

뿌리의 끝 영홍한 한 방울 독약처럼

당신의 향기로운 잠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 강인한 '강변북로' 詩로여는세상, 2012

 

 



.................

 

....  북위 50도가 조금 못 되는 중부유럽의 요즘 날씨는 적도의 그것을 흉내내고 있다. 

잦은 스콜성 소나기가 그렇고, 후덥지근한 고온이 또한 적도의 그것 같다.

그러나 차 에어콘을 틀어본 게 거의 오륙년 전인 나는 

여름에 살고 있지만 이런 여름이 기막히게 좋다.

 

..... 꼭두새벽 친구 유타가 문자로 전해왔다.

"우리의 친구 R가 해냈어, 

금일 3시 10분에 그녀가 드디어 육체를 벗어났나네." 

전형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이것이 부고의 전문이었다,

이 문구는 밭일을 하고, 운전을 하는 동안 아주 여러 번 마음을 동여 맨 문장이다.

나와 동갑인 R는 나보다는 친구 유타의 절친,

두어달 전 쓰러졌고, 호스피스에 빈방이 없어서 일반 병동에서 연명치료를 받고 있었다.  

나와는 뭔가가 자꾸 어긋나서(내가 한 성질 하므로) 그녀와 대화 워츠앱을 차단하기까지 했었는데, 

이렇게 빨리 갈 줄 누가 알았어야지....

 

..... 이번 달 휴가가 있다.

제주에 다시 갈까 했지만, 초대를 받아둔 스위스 테신(Tessin) 지방의 루가노 산골에나 다녀올까 고려 중이다.

..... 사진은 무지개를 만난 늦은 오후, 운 좋게도 동쪽방향 운전할 때였다.

 

.... (방금 필사한 시 하나 더)

/문태준

집을 비운 사이 우편배달부가 다녀갔나 봐요

편지 한통을 두고 갔는데 편지 위에 작은 돌을 두 개 올려 놓고 갔지 뭐예요

흙 묻은 두 개의 돌은 하얀 편지 봉투를 꾹 누르고 있었지요

편지 봉투를 뜯고서 나비처럼 나울나울 날아가려는 당신의 문장을 

그저 그것만을 지키려고 요만큼의 돌이 되었노라고 말을 하는 듯 했는데요

그래서 그 돌들을 그대로 뒀지 뭐예요

이제 당신의 마음은 조그마한 돌 같은 내 속가슴에 넣어두고 열어보지 않기로 해요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4, 7월호

 

..... 이달의 시 공개를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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