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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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4. 5. 1. 22:16

 

 

 

봄비 

/ 배한봉

당신은 새 잎사귀의 걸음으로 내게 들어왔다

하늘에서 대지로 조용조용 속삭이며 노크하던

당신의 발자국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고

피가 돌아 세계의 상처에 살이 차올랐고

구름의 눈썹 아래로 휴가 떠난 태양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간절했던 것들은 간절하게 자라서

척박한 페이지에 초록빛 문장을 새겨 넣었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서면 그새 새로 출간된

날개가 내 겨드랑이에서 언뜻 보였다

투명한 잎사귀의 걸음으로 당신이 내게 들어올 때

나뭇가지 안에 갇혀 신음하던 그 춥고 아픈,

간절한 것들이 찍어놓은 푸른 바코드

젖은 말들이 도처에서 재잘대며 걸어 나오고 있다

당신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달려 나오고 있다

- 배한봉 '주남지의 새들' 천년의시작  2017

 

 

 

 

 

 

 

라일락

 / 허수경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공중에서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어느 사랑의 기록

/남진우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 난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친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핥고

가시 돋친 손으로 부드럽게 가 속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 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둘러싸인 나는 움직일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흑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 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 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랑이 끝나갈 무렵

가시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저무는 몸

저무는 의식 속에 아스라한 흔적만 남긴 채

가시는 사라져 없어진다

 

가시 하나 없는 몸에 옷을 걸치고

나는 어둠에 잠긴 사원을 향해 떠난다

이제 가시 돋친 말들이

몸 대신 밤거리를 휩쓸 것이다

 

 

 

 

 

 

..................

 

 

..... 감자를 심었다.

주말에 감자 22알을 심었다. 감자가 주식인 나라에서 감자를 심는 일은,

수확한 몇톨 감자를 먹는 일보다 뿌듯하다.

밭농사를 한다고 했을 때 별 반응이 없던 지인들이 감자도 심는다는 말을 듣고서야 제대로 인정해 주었다.

고로 농사한 감자들 중 씨감자 스무알 남기고, 성탄 선물에 끼워 다 나눠준다. 

고구마라면 몰라도 감자는 뭐 굳이....

 

사족이 있다, 감자 심고 근육통이 심히 왔다, 

기분 좋은 농사통이 시작되었다.

 

..... 사진들은 이웃 텃밭의  2024년 5월 1일 노동절 아침 풍경.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듯한 라일락,

허수경 식의 생애 다정한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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