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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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4. 3. 1. 02:14

 

 

 

명자나무 곁에서
 / 임영조

오랜 침묵만이 꽃을 피울까
영하에도 꼿꼿이 언 손 들고 벌서던
침묵의 가지 끝에 돋는 응어리
진홍빛 뾰루지를 보는 것도 아프다
오늘은 기어이 발설하리라
잉걸처럼 뜨겁고 위험한 자백
궁금해, 귀를 갖다 대본다
(아직 입 열때가 아니다!)
삼월의 끄덩이를 잡아채는 꽃샘바람
이미 붉어 탱탱한 입술 꼭 다문
명자꽃 망울이 뾰로통하다
해도, 그리운 명자 씨!
어서 귀엣말을 속삭여다오
그 내밀한 사랑의 불씨로
내 가슴속 외로움 다 태워다오
그게 혹 새빨간 거짓말일지라도
오늘은 다 곧이듣고 싶다
아직도 입다물고 망설이는
명자 씨!
온몸에 은근히 가시를 숨긴!

- 임영조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민음사  2000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내버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저녁이라고 부른들 죄가 될 리 없는 저녁이다

누가 아파도 단단히 아플 것만 같은 저녁을 보라
저녁에 아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기 좋은 저녁이다

시내버스 어딘가에서
훅,
울음이 터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저녁이다

이 버스가 막다른 곳에서 돌아 나오지 못해도 좋을 저녁이다

- 계간 '시인수첩'  2019 가을호

 

 

 

 

 

 

누가

​/정병근

내 안에 나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 있다

낯설고 외진 사람 내 안에 살고 있다

당신의 어깨를 치며

명랑한 듯 슬픈 듯

팽팽한 거미줄이 가지 사이 빛이 난다

그 어떤 불멸이 날 버리고 지나간다

또 다른 누가 되어서

나인 듯 살 것이다

너무 많아 모자란 세상의 소용들아

안 함보다 못한 일로 뒤돌아 괴로울 때

그 누가 나를 붙잡고

긴긴 말을 하는가

- 계간 '가히' 2023 겨울호

 

 

 

 

............. 3월에 읽는 시를 올릴 즈음이면 내 무거운 회환의 두 발이

꿈에도 그리던 땅을 밟고 있을 것이다.

내 나라 소백산의 한 조용한 산사,

그곳에서도 말 수가 적은 고목 하나를 마주하고 

한 줄 침묵의 문장으로 고하리라.

저 왔어요.

 

.............몇 십년 전 아버지께선 낯선 나라로 떠나려는 철없는 여식 나를 앞세우고

조상들 묘를 찾아 인사를 시켰다.

청주와 제기와 돗자리를 들고 산과 들을 걸어서 이틀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사진은 뒷산 숲 산책 중에 만난 설강화(Schneeglöckchen), 운이 좋았다.

 클릭하신 분들, 이 춘삼월에 '잉걸처럼 뜨겁고 위험한 자백'(맨 위의 시에서)에 꼭 귀 대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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