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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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3. 12. 2. 06:59

 

 

 

손의 고백 
/ 문정희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의 손이 언제나 욕망을 쥐는 데만
사용되고 있다는 말도 거짓임을 압니다
솨아솨아 작은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무엇을 쥐었을 때보다
그저 흘려보낸 것이 더 많았음을 압니다
처음 다가든 사랑조차도
그렇게 흘러보내고 백기처럼
오래 흔들었습니다
대낮인데도 밖은 어둡고 무거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
숨죽여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 욕망도 없이 캄캄한 절벽
어느새 초침을 닮아버린 우리들의 발걸음
집중 호우로 퍼붓는 포탄들과
최신식 비극과
햄버거처럼 흔한 싸구려 행복들 속에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생매장된 동물처럼
일어설 수도 걸어갈 수도 없어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문정희,『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

 

 

 

낙과落果

 / 정호승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 정호승,『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하루를 기다리며

​/정호승

나는 하루를 기다리지 못한다

하루를 기다리지 못해 일 년을 기다리고

일 년을 기다리지 못해 평생을 기다린다

어제 하루도 내일 하루도

하루를 기다리지 못해 당신을 기다리지 못한다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은 나를 찾아와

내 더러운 욕망의 발을 씻겨주시지만

시궁창에 떨어진 내 눈물도 건져 깨끗이 씻겨주시지만

용서는 당신의 몫이라고

아버지처럼 고요히 내 어깨를 감싸 안아 주시지만

나는 먼 산마루까지 켜켜이 쌓인

당신에 대한 적의도 원한도 버리지 못하고

오늘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는 동안

내 평생이 다 지나갔다

ㅡ계간 《문파》(2023, 가을호)

 

 

 

 

독백​ 

/ 류근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밀린 월급을 품고 귀가하는 가장처럼

가난한 옆구리에 낀 군고구마 봉지처럼

조금은 가볍고 따스해진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이 지상에서

그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가 잠든 새 그가 다녀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등불 아래 착한 편지 한 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내 기도에 날개를 씻고

큰 강과 저문 숲 건너 고요히 내 어깨에 내리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실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처럼 반짝이며 물고기처럼 명랑한 음성으로

오로지 내 오랜 슬픔을 위해서만 속삭여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끗한 울음 한 잎으로 피어나

그의 무릎에 고단했던 그리움과 상처들을 내려놓고

임종처럼 가벼워진 안식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젖은 눈썹 하나로 가릴 수 없는 작별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별

숫눈길 위에 새겨진 종소리처럼

- 류근,​『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

 

.....12월이다.

그간 골라 둔 시들에

사나흘전 스위스 넘어오며 찍은 사진들 사이사이 넣었다..

.....조용히 맞이한 축제처럼

공책과  수채화 물감 달랑 싣고,

며칠째 쏘다니고 있다.

.....행복하시길.....

피렌체에서 인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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