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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3. 9. 1. 04:08

 

소식

/이덕규

 

 

흰나비 한 마리가 너럭바위 위에 앉아

아무런 기약 없이 떨어져 쌓이는 꽃잎 사연들을

벌써 여러장째

복사하듯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먼 실연의 벼랑 끝에 맺힌 꽃봉오리에게

이 사태를 전하러 가야 하는데

흰나비가 문득 날개를 접고 골똘해집니다

한때 뜨거웠던 기억에 피가 도는지

캄캄했던 바위가 조금씩 물렁해지는 한낮입니다

- 오직 사람 아닌 것, 문학동네, 2023

 

 

 

 

 

두부 이야기

​/정끝별

출생의 비밀처럼 자루 속 누런 콩들이 쏟아진다

이야기는 그렇게 실수처럼 시작된다

비긋는 늦여름 저녁 식탁에 놓일 숟가락 개수를 결정해야 해, 그게 라스트신이거든

물먹다 나왔는데 또 물먹으며 으깨진다

시간의 맷돌은 돌아가고 똑딱똑딱 떨어져 고인

너의 나날은 푹푹 삶아져야 고소해지고

거품을 잘 거둬낼수록 순해진다

매 순간의 물과 불 앞에선 묵묵한 캐릭터가 필요해

오랜 짠물은 너의 단맛을 끌어올려준다

몽글한 웅얼거림과 뜨거운 울먹임이 뒤섞여 엉겼다가

무명 보자기에 걸러지면서 단단해지는 이 플롯을

구원이라 할까 벌 아니면 꿈이라 할까

담담한 눈빛과 덤덤한 낯빛으로 맞이하는 밥상에서

만만찮은 희망으로 만만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콩밭 매는 마음과 콩밭에 간 마음을 쓸어 담아

써 내려가야 갈 너의 한밤이 희고 깊다

밤새 이야기는 그렇게 쏟아지고 불려져

아침의 너는 또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ㅡ시집 『모래는 뭐래』(창비, 2023)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강처럼 

/ 문태준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 문태준,『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

 

 

.....' ~될 줄이야.'. 하는 탄식어를 입으로 내뱉은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자꾸 마음이 결리는 서정일변의 시 '~ 가을강처럼'

내 몸을 스캔하고 지나는 빛, 그 빛 소재로 머릿속 빠르게 소묘 한장 그렸다.

그 바탕에 수채물감까지 입힐까 고민했다.

 

...... 시 '소식'은 한편의 신화처럼 읽었다.

(시인은 떨어진 꽃잎 사연을 복사하는 행위라 했지만)

나비가 날개를 접었다가 폈다가 할 때의 미세한 바람이 시 읽는 내 코끝에 감지되었다.

마침내 날개를 접고 골똘해 졌다 할 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의 바위가  말랑말랑 만져졌다.

이 시를 3번 정도 읽었다.

처음엔 나비만 보였고, 두번짼 꽃잎 사연이

그리고 세번짼 빵반죽처럼 말랑해진 바위가 제 자리를 찾아 열을 식히고 있었다.

네번째까지는 안 읽어도 되겠다.

 

...... 사람을 만나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왼손 주먹을 쥐어보라고 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딱 쥐어진 주먹크기 만큼이 얼추 그 사람의 심장 크기이다.

참고로 나는 손가락이 길쭉하여 쥔 주먹도 작다, 고로 소심쟁이.

마음 속 애인에게 민들레 씨앗에 붙은 흰날개를 달아 줄 생각이다.

어디든 날아가 실한 뿌리 내리고 잘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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