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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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3. 6. 1. 07:40

기다림에 대하여

/정일근 

 

기다림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늦은 퇴근길 107번 버스를 기다리며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 쓴다
들쥐들이, 무릇 식솔 거느린 모든 포유류들이
품안으로 제 자식들을 부르는 시간,
돌아가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부르고 싶다, 어둠 저편의 길들이여
경화, 태백, 중초 마을의 따스한 불빛들이여
어둠 저편의 길을 불러 깨워
먼 불빛 아래로 돌아가면, 아내는
더운 밥냄새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리
아이들은 멀리 있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으리
살아 있음이여, 살아 있음의 가슴 뛰는 기쁨이여
그곳에 내가 살아 있어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 쓴다
푸른 별로 돋아나는 그리운 이름들을 쓴다

 

 

꽃의 고요

/ 황동규​​

 

일고 지는 바람 따라 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 꽃의 고요', 문학과지성사, 2006

 

 

늙은 참나무 앞에 서서 
/ 이윤학

무수히 떡메를 맞은 자리에
엄청난 둔부 하나가 새겨졌다

벌과 집게벌레가 들어와
서로를 건드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무언가를
열심히 빨아먹고 있다

저긴, 그들만의 천당이다
누군가에게
내 상처가 천당이 될 수 있기를

내가 흘리는 진물을
빨아먹고 사는 광기들!

다시,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다
누군가 떡메를 메고 와
열매들을 털어 가기를
더 넓게 더 깊게
상처를 덧내주기를

누군가에게 가는 길,
문을 여는 방법,
그것밖에 없음을

- 이윤학,『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문학과지성사, 2000)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 이번 달에 옮겨 온 것은 하나 같이 명시여서 

암기력이 따라만 준다면 싯귀들을 줄줄 외며 뒷산 숲길을 오가고 싶다.

 

..... 두 팔 벌려 유월 맞아야 하는데 생각은 오월에 머무는 중이다.

죽죽 긁힌 오른팔 상처를 그나마 오월로부터 가져 왔다.다행이다. 

오순절 공휴일인 지난 월요일에 고사리따러 뒷산에 올랐다가 비탈길에 발을 헛디딘 덕분이다.

여전히 고사리가 제철이고 라일락이 절정이라며 나흐티갈*이 시도때도 없이 알려준다. 

 

..... 블로그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이 늘어 간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지만 생각해 보니

이렇게 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반성을 해야 한다면 딱히 뭘 반성해야 할지 모르겠다. 

 

..... 시인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옮겨 왔으며

사진들 가운데 운전 중에 찍은 것은 창 먼지가 유난하다.  

 

 

*나흐티갈Nachtigal - 새의 한 종류로 노래를 아주 잘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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