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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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3. 3. 1. 08:00

 

 

까짓것

/이정록

 

개업 기념 반값 미용실에 갔다가

시궁에 빠진 미운 오리 꼴이 되었다.

단골집에 가서 다시 다듬었다.

더 이상하다. 빈털터리가 되었다.

까짓것, 빡빡머리 스님도 산다

아이들이 나만 보면 툭툭 치고 지나간다.

나보다 낫다는 걸 확인하는 거다.

까짓것, 떡갈나무는 잎이 넓어서 바람도 크다.

태평양 범고래는 덩치가 커서 마음도 넓다.

이 년 사귄 여친이 전학 온 서울 것과 사귄다.

아직 이별 문자가 없다는 건 서울 놈과는 우정이란 거다.

까짓것, 사랑과 우정도 구별 못 하면 진짜 촌놈이다.

친구끼리 영화관 가고 팔짱 끼는 건 당연하다.

우정으로 마음을 가꿔서 진한 사랑으로 돌아올 거다.

까짓것, 취업이든 사랑이든 경력자 우대다.

난 어려서부터 심부름을 잘했다.

망을 잘 보고 빵과 담배를 잘 사 나른다.

까짓것, 겨울이 오기 전에 살만 조금 빼면

산타가 되어서 굴뚝도 들락거릴 수 있을 거다.

선물 심부름은 산타가 최고니까 말이다.

쪽지 글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운다. 여동생도 운다. 냉장고도 운다.

까짓것, 이라고 말하려다가 설거지하고

헛기침 날리며 피시방으로 알바 간다.

까짓것, 돈은 내가 번다.

까짓것, 가장을 해보기로 한다.

 

 

 

 

 

봄비

/ 오탁번

 

봄비 오는 이른 아침

초등학교와 고층 아파트 사이로

반짝이는 도로가 번드럽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버스도 택시도 트럭도

모두 다 멈춘다

길 건너는 사람 하나 없는데

줄줄이 파란불을 기다린다

참, 착하다

점심 때 비닐우산 쓰고

의림지 칼국수 집에 가서

뜨거운 국수 훌훌 먹고 일어서는데

상냥한 주인아줌마가

봉지에 겉절이를 이만큼 담아준다

먼저 나가려던 젊은이가

날 보더니 비켜서서

눈인사를 한다

다들, 참, 착하다

봄비 오는 날

내 맘도 덩달아

참, 착해지누나

천둥 치며 쏟아지는 소낙비가

그중에 으뜸인 줄 알고

동네방네 소리친 시인아

시도 딱 이렇게

봄비처럼

보슬보슬 쓰렷다?

- '현대문학', 2022년 6월호

 

 

 

 

 

첫사랑

/이정록

 

헤어진 지

열흘이 됐다.

나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것이다.

세월이

약이라면.

 

 

 

 

 

 

 

............................

 

 

..... 시를 정하고 이미지를 고르는데 어머나, 새로 찍은 사진이 없는 거야.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상을 살았을 텐데  지난 2월엔 그 흔한 산책도 제대로 안 했나봐.

새벽마다 요가에 몇 분 명상을 한 것으로 본전치기할 게 아닌데 말야.

억울혀! 

 

..... 하는 수 없이 1년 전의 사진을 뒤졌지.

1년 전 오늘은 흑해 도시 바투미행 기차를 탔더구먼

곰 한마리 쫄랑쫄랑 데리고 말이지.

바투미 해변의 몽돌들을 생각하던 한 동안은, 원래 내것이던 것을 두고온 느낌이었지.

파도가 한번 쓰다듬고 가면 거품 속에서 초록이 더 짙어지더라고.

그 순간은 그 어떤 신화도 믿을 것 같았지.

 

..... 카우카수스 설경 사진은

카즈베기에 발 디딘 후 해 지는 쪽으로 돌아오던 어디쯤이지. 

내가 십자가를 찍었다기보다는 

십자가가 내 사진으로 들어온 게 맞아. 

 

..... 시인들에게 감사하고, 읽어주셔서 더 감사하고 

3월엔 볼 꽃 다 보고 챙길 봄 다 챙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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