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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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3. 7. 1. 05:11

 

 

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2022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그런 날

/박형준

 

오래 서가에 꽂아 둔 낡은 책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편지를 발견할 때,

마치 내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처럼 아릴 때

그런 날에는, 정말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를 꺼내어 연주해야 한다

가슴에 묻어 둔 사랑의 밀어를 바라보면

기억조차 희미해져 제 별자리로 돌아간 듯하다

어느 누군가도

나에게 그런 편지를 썼으리라

흐릿한 시간의 별자리에서 천천히 돌고 있는,

어린 무 잎처럼 아린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부치지 못한 편지들

먼지와 세월에 얼룩진,

뒤틀린 책 속 공명통에서 울리는

나의 밀어와 영혼을 간직한 악기여

- 시집  '불탄 집'  2013

 

 

 

 

마른 장마

/문성해

장마는 장마지요 내 눈 속에만 비가 억수로 퍼붓는 장마지요 하나도 젖지 않은 구름이고 하나도 젖지 않은 담장이고 백일홍이고 개털이고 한낮이고 내 사랑이지요 당신에게로 흘러가지 못한 내 마음은 흠뻑 젖었지요 먹구름이 둘러싸인 마음이지요 누르면 튿어지는 마음이지요 장마는 장마지요 옷장을 구길 만큼 단번에 휩쓸려오는 습기지요 예언이지요 오래 대고 있으면 종이에 구멍이 뚫리는 무서운 혓바닥이지요 닥종이를 덧댄 문 안에서 오늘도 당신은 문고리를 붙잡고 울어요 오늘도 나는 가슴속에 천 톤의 배를 밀고 가요

- 시집 '입술을 건너간 이름' 2012

 

 

 

어느 날 스타벅스에서

/이상국

 

나에게는 이제 남아 있는 내가 별로 없다

어느새 어둑한 헛간같이 되어서

산그늘 옛집에 살던 때 일이나

살이 패리도록 외롭지 않으면

어머니를 불러본 지도 오래되었다

저녁내 외양간에 불을 켜놓고

송아지 나올 때를 기다리거나

새벽차를 타고 영을 넘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거의 새것이다

그동안 많은 것을 보고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아닌

나는 저 산천의 아들, 혹은

강가에 모래 부려놓고 집으로 가는 물처럼

노래하는 사람

나에게는 지금 내가 아는 내가 별로 없다

바퀴처럼 멀리 와 무엇이 되긴 되었는데

나도 거의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그 사람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패리다: '야위다' 라는 뜻의 강원도 사투리(옮기면서).

-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2016

 

 

 

....................

 

 

..... 7월이다.

여름 사진을 고르면서 밧 빌밧Bad Wildbad 사진이 눈에 들어 왔다.

엔츠(Enz)강이 도시의 중심을 지나는데,

저 강때문에 애초에 사람이 정착하고 또 마을이 생성되었었지 싶다.

한때 1만 천명까지 갔지만 근래엔 1만 명에 3백 여 명을 더한 게 이 도시의 공식인구이다.

개울 만한 크기의 저 강은 늘 맑고 차다.

보기에 꾸정물 같지만 진짜 맑고, 흘러흘러 네카강으로 합류한다. 

 

저 도시의 치과를 다니므로 한해 몇 번은  가야한다.

정든 저 도시에서 대대로 터 잡고 살던 친구가 몇 년 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려서

텅 빈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사진들의 강가 어디에 나의 단골 치과가 있다.

치과는 원래 친구 아버님이 입지하셨던 곳이고

후임으로 친구네 먼 친척 질녀인 부부치과의사에게 되물림을 하였었다.

치아가 형편없어서 소중한 어금니 하나를 꼭 살려야 할 형편이었던 몇 년 전,

친구의 각별히 부탁으로 그 부부 친과의사가 정성을 다해 거의 불가능했던 내 어금니를 되살려 주었던 곳.

이제 친구는 없다.

친구의 먼 친척이던 능력자 부부도 후임을 마련하고 어디론가 떠났으므로

치과에선 몇 달에 한번 내 전화 응답기에 정기 진료를 알려올 뿐이다. 

 

이런 쓸쓸함 때문에

어지간 하면 인연을 짓지 않으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앞으로도 더 겪을 것 같은 안타까운 예감이 든다.

 

..... 3번째 사진이 이곳 전철역이며 종점 바로 전이다.

저 곳에 가면 개울(아참 '강'이지)에 걸쳐놓은 몇 개 짧은 다리를

이쪽저쪽 건너다닌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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