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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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3. 10. 1. 07:19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 권대웅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기억이 있다

당신을 적셨던 사랑

​아프지만 아름답게 생포했던 눈물들

신호등이 바뀌지 않는 건널목에서

비 맞고 서 있던 청춘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마다

기우뚱 하늘 한구석이 무너지고

그 길로 젖은 불빛들이 부푼다

흐린 주점에서 찢었던 편지들이

창문에 타자기의 활자처럼 찍히는

빗방울의 사연을 듣다보면

모든 사랑의 영혼은 얼룩져 있다

비가 그치고

가슴이 젖었던 것은 쉽게 마르지 않는다

몸으로 젖었던 것들만이 잊힐 뿐이다

밤거리를 맨몸으로 서성거리는 빗방울들

사랑이 떠나간 정거장과 쇼윈도와 창문과

나무들의 어깨 위로

구름과 놀던 기억들이 떨어진다

국화 허리 같은 당신이 떨어진다

가을비는 흐르지 않고 쌓인다

-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2017

 

 

 

 

 

 

그 후

/김재진

 

화병은 넘어지고 물은 쏟아졌네

내 안에 누가 들어왔다 갔는지

꽃은 꺾이고 향기는 사라졌네.

누가 들어와 내 마음 흐트려놓고 갔는지

새들은 날아가고 깃털만 어지럽네.

누가 내 안에

손가락 디밀어 분질러놓고 간 건지

가지는 부러지고 꽃잎만 분분하네.

-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 꿈꾸는서재 2015

 

 

 

 

어떤 이별 

/ 박철

산다는 게 결국 보쌈이란 생각이 듭니다

앞과 뒤를 가리지 않고 만나 함께 길을 가다

사랑이 뭔지조차 모르고 살다가 이제 헤어지니

셈이 흐린 탓에 떠나가야 하나 그것도 사랑이라 합시다

내 부모 앞뒤 없이 나를 낳아도 뼈가 아프도록

사랑을 하고 저울 없이 사랑하다 생을 마칩니다

트럭에 실려 가는 거대한 나무가 신호등 앞에서 잠시 쉽니다

어디 가서 또 한동안 아픈 사랑을 하겠지요

친친 감긴 뿌리도 새 자리를 찾겠지요

마침내 경전철 건설 확정 강남까지 사십 분

현수막에 잎을 털며 나아가는  나무의 마음을

운전사는 또 모르겠지만 그 나무의 이사로

한 가족은 오늘 조금 따뜻한 저녁을 보내겠지요

바보같이 만나 바보처럼 살다가

바보처럼 헤어지는 것도 다 사랑이겠지요

아픔을 헤아리면 끝이 없고

끝이 없는 시간에 맡기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후회도 없이 미련도 없이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런 생각도 이젠 하지 말고 삽시다

제 주제를 안다면 산다는 게 너무 맥없기도 하겠고

돌아보면 가슴만 벅찰 거 아니겠습니까

별사 치곤 너무 싱겁긴 합니다만

-  '작은 산' -실천문학사 2013

 

 

 

 

 

..... 사진들은 내가 좋아하는 능선, 휘겔이다.

우리말의 능선보다는 독일어 휘겔Hügel 이 저 풍경에는 더 맞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휘겔은 멀리까지 위 아래 맨숭하게 바라보이고 

우리나라 능선은 곳곳에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 변화롭기 때문)

오가기에 한 나절 걸리는 친구 아니타의 뼈병원 가는 길에 만나는 풍경들이다.

친구는 전화로 손가락 재활치료를 어찌나 강요하던지

내게 시어머니가 있다면 아마 그 억양이었지 않을까. 

이제 저 능선을 지날 때마다 아니타의 울퉁불퉁한 잔소리를 연상하게 될 것 같다.

 

..... 시 '그 후'는 떨어진 꽃잎과 부러진 가지를 만지고 있음에도 읽은 기분이 산뜻하다.

그러고 보니 김재진 님은 아주아주 오래 전에 뵌 적이 있다.

한장 흑백사진의 기억처럼 굵고 검은 테 안경의 어른 남자,

어떤 문학회에서 동석했을텐데 말을 섞은 기억은 없다.

 

..... 그 외 2편 시가 공교롭게도 '사랑'이란 단어가 얼기설기 엮였다.

별로 쓸 말 없다.

다만 첫 시는 이 가을비 내리는 어느 저녁 즈음  

와인 안주로 따로 챙겼다.

시인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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