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10월에 읽는 시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0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4. 10. 1. 03:45

 

 

 

준비  - 열애 일기 4
/ 한승원

산 단풍의 색깔은 조금씩 진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하룻밤의 찬서리와 함께 갑자기 새빨개지고 샛노랗게 된다고 산에 사는 젊은 비구니 스님이 그랬습니다

낙엽은 한 잎 두 잎씩 지는 게 아니고
어느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 담벽 무너지듯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산에 사는 늙은 스님이 그랬습니다

나는 날마다 준비합니다
사랑하는 당신께 가노라는 말도 못 하고 어느 하룻밤 사이에 단풍처럼 진해졌다가 담벽 무너지듯 떨어져갈 그 준비

- 한승원, 『열애일기』(문학과지성사, 1995)

 

 

 

 

저 별빛 

/ 강연호

그리움도 버릇이다 치통처럼 깨어나는 밤

욱신거리는 한밤중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지친다 더 이상 감추어둔 패가 없어

자리 털고 일어선 노름꾼처럼

막막히 오줌을 누면 내 삶도 이렇게 방뇨되어

어디론가 흘러갈 만큼만 흐를 것이다

흐르다 말라붙을 것이다 덕지덕지 얼룩진

세월이라기에 옷섶 채 여미기도 전에

너에게 쓰는 편지는 필경 구겨버릴 테지만

지금은 삼류 주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

넘지 못할 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너에게

가고 싶다 빨래집게로 꾹꾹 눌러놓은

어둠의 둘레 어디쯤 너는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마음은 늘 송사리떼처럼 몰려다니다가

문득 일행을 놓치고 하염없이 두리번거리는 것

 

저 별빛 새벽까지 욱신거릴 것이다

- 강연호,『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문학세계사, 1995)

 

 

 



 

읽히지 않은 문장

​/최해돈

비는 내렸다

그러니까

내린 비는, 누군가의 숙명이었다. 누군가의 눈물이었다. 누군가의 결핍이었다. 누군가의 미완성이었다. 누군가의 약속이었다. 누군가의 결말이었다. 누군가의 평행선이었다. 누군가의 노트였다. 누군가의 늦가을이었다. 누군가의 기록이었다. 누군가의 배경이었다. 누군가의 흔적이었다. 누군가의 기도였다

비는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리는 비는, 누군가의 꺼지지 않는 불빛이었다. 누군가의 접힌 창문이었다. 누군가의 사방으로 퍼지는 파열음이었다. 누군가의 읽히지 않은 문장이었다. 누군가의 멀어져가는 추억이었다. 누군가의 거친 호흡이었다. 누군가의 흔들리는 봄이었다. 누군가의 내일로 걸어가는 푸른 눈동자였다. 누군가의 흰 종이에 찍힌 발자국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비는

비는

비는, 그러니까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추적추적 쉼 없이 내리는

무형의

시간을 역행하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좀 짤막한

저, 비는

ㅡ계간 《시와문화》(2024, 가을호)

 

 

..............



 

.....

문법도 규율도 깡그리 무시해버린

하루를, 아니 한 오후라도 낙서장처럼 살고싶다.

내 생에 단 한번은 니코틴향을 폐부에 빵빵 불어 넣어보기

큼직한 백지에, 억눌러만 두었던 아무 단어 아무 이름들을 배변처럼 갈겨놓기

처음부터 망치자 하고, 그림지에 아무 물감이나 마구마구 칠하기

 

욕망의 문장이 길어지고

말이 많아진다.

 

.....

비와 치통과 모차르트가 공존한 오후를 지나

밤이다.

지난 달 동안 읽고 수시로 모아둔 시들은 용케도 연애시 일색, 

 

제목에서부터 열애시라고 쓰고 가을 단풍의 일기로 독백하는 것부터

접속어와 시어의 의식적 반복에 쉽게 호응이 안 되지만 

비 오시는 모습의 가시적인 표현인 듯 해서 굳이 '읽히지 않는 문장'도 모셔왔다.

 

더  써주신 분들께 감사한다. 

 

.....

숲배경 사진이 젖었다, 장대비 덕분이다.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월에 읽는 시  (13) 2024.12.01
11월에 읽는 시  (20) 2024.11.01
9월에 읽는 시  (25) 2024.09.01
8월에 읽는 시  (4) 2024.08.02
7월에 읽는 시  (30) 2024.07.0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