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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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4. 12. 1. 18:35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

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 자격을 떠올렸던 적

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의했던 적

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

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

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사랑의 불가능

/고영민

 

나무는 잎을 지웠다

이제 새를 모을 방법이란 무엇일까

시효가 있는 걸까

사람에게도

 

불이 붙지 않는 재와 같이

물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 같이

 

일생을 다하고 폭발하는 별과 같이

울지 않는 새와 같이

새가 없는 하늘같이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고*

사랑은 멈출 리 없고

 

헤어짐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만남의 시기가

끝난 것이다

 

*욥기 7장 6절 

 

 



 

망각을 위하여 

/ 문정희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한 일은

그동안 쓴 시를 고치고 주무르다가

망가뜨린 일이다

시는 고칠수록 시로부터 도망쳤다

등 푸른 물고기떼 배 뒤집고 죽어 가듯이

생명이 빠져나갔다

꽁지 빠진 새처럼 앙상한 가지에 앉아

허공을 보고 나는 조금 울었다

벌목꾼처럼 제법 나이테 굵은 침엽수 활엽수

다듬고 쪼개다가 불쏘시개를 만들고 만 것이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헛것과 헛짓에 목매단 것이다

나는 울다가 눈을 떴다

그래 이대로 절뚝이며 살아라

나 또한 헛짓하며 즐거웠다

나는 시들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부서진 욕망, 미완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

불온한 생명이여

어쩌다 내가 기념비적인 기둥 하나를 세웠다 해도

얼마 후면 그 기둥 아래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을*

* 헝가리 소설가 산도르 마라이.

- 문정희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민음사 2022

 

 

 



 

.....................................

 

 

 

..... 12월이 문 앞에 와 있다.

첫 서리가 왔고,

첫 눈이 내렸고,

나이 많이 든 나는 11월에 나이가 급속하게 더 들었다.

 

다시 헤세의 시 "계단" 을 읽었다.

몇 년씩 주기로 꺼내 읽는 시,

싯구사이를 느릿느릿 걷다가 단단한 시어들에 오래 걸터 앉아 있기도 하였다.

이별을 담담히 대하며

인생의 변화를 경쾌하게 대하라 했던 헤세,

그와 차 한잔 마시고 싶다.

 

글을 쓰는 중에 몇 년 연락이 없던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보름 후 근처를 지난다며 

크리스마스마켓에서 뜨거운 와인 한 잔 나눠마시잔다.

'뭐, 그러지'라고 답했다.

 십수년째 오가는 빈말,

그 빈말을 다시 하게 되니 연말이다. 

 

..... 시 써준 분들께 감사하며,

그저 가져왔음에 또한 송구스럽다.

 

..... 사진은 작년의 오늘 피렌체에서 오는 길 풍경들이다.

글짜로 밀라노,베네치아, 루가노, 베른 등등을 읽으며 운전대를 지키는 동안 

진눈깨비가 차창을 하염없이 막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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