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프로이덴슈타트
- 바질소금
- 뽕나무
- 독일흑림
- 흑림의 성탄
- 코바늘뜨기
- 카셀
- 잔설
- 흑림의 샘
- 흑림의 봄
- 독일 주말농장
- 루에슈타인
- 독일 흑림
- Schwarzwald
- 흑림의 오래된 자동차
- 흑림의 겨울
- 뭄멜제
- 감농사
- 헤세
- 흑림의 여뀌
- 익모초
- 싸락눈
- 흑림
- 꿀풀
- 우중흑림
- 흑림의 코스모스
- 바질리쿰
- 텃밭
- 마늘풀
- 힐데가드 폰 빙엔
- Today
- Total
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10)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시작이 너무 많이 남았다 /박무웅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에게 주어진 시작과 끝의 횟수가 동일하지 않다는데 내겐 시작이 더 많았을까 아니면 끝이 더 많았을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궁금증을 뒤져보면 남아있는 끝의 개수는 알 수 없고 다만 시작은 꽤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시작은 지금 당장 실행해도 될 것 같고 또 어떤 시작은 때를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 새로 발견한 시작 하나를 들고 이 봄밤을 잠 못 이루는 것이다 지나온 생을 돌아보면 험난했던 시작들과 영예로웠던 끝이 적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시작을 찾고 또 찾는 것이다 끝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다 팽팽하고 질긴 시작 하나를 골라서 시위를 매고 힘차게 당겼다 놓으면 시작은 저 멀리까지 순식간에 날아가 꽂힌다. 나보다..
고도를 기다리며 /황명덕 보아뱀 뱃속에 갇힌 아기코끼리는 얼마나 큰 소리를 질렀을까 고도를 기다리며 뱀의 아가리는 닫히고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점점 녹아드는 통증에 고도는 올 것인가 마침내 올 것인가 한 점 빛도 보이지 않는 솔잎 같은 칼바람 언 손등을 핥고 지나가는 밤 고도는 올 것인가 보아뱀 뱃속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아기코끼리처럼 - 시집 ´대청도 바람일기´ 리토피아, 2022 불편 /이명윤 물끄러미가 나를 보고 있다 버스를 타도 물끄러미 커피를 마셔도 물끄러미 어느 날 시장에서 졸졸 따라와 나의 허공을 떠나지 않는다 우럭과 가자미 몇 마리 손질을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무 몇 개 상추 몇 단 단출하게 바닥에 놓고 앉은 노파의 눈 속에 사는 물고기, 오래된 호수가 품은..
봄 편지 /곽재구 강에 물 가득 흐르니 보기 좋으오 꽃이 피고 비단 바람 불어오고 하얀 날개를 지닌 새들이 날아온다오 아시오? 바람의 밥이 꽃향기라는 것을 밥을 든든히 먹은 바람이 새들을 힘차게 허공 속에 띄운다는 것을 새들의 싱싱한 노래 속에 꽃향기가 서 말은 들어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새들의 노래를 보내오 굶지 마오 우린 곧 만날 것이오 국수처럼 쏟아지는 잠 /김중일 한 사발의 잠에 국수를 말아 먹는 밤에 비가 무시무시하게 쏟아지는 밤에 폭식의 밤에 썩은 이빨처럼 까만 창문들 사이에 끼어 지구가 시커멓게 벌어진 입처럼 둥근 지구가 천공의 빗줄기를 태풍처럼 둘둘 말아 한 젓가락에 후루룩 끌어당기는 밤에 영문도 모르고 땅과 바다에 묻힌 사람들은 배가 부르다 지구처럼 지구만큼 터질 듯 배가 부르다 영문도 ..
빌뱅이 언덕 /이정록 더는 갈 데 없을 때 막다른 내가 몰래 찾는 곳이 있다 호리병처럼 한숨만 삐져나올 때 몸의 피리소리가 만가처럼 질척거릴 때 더러운 자루를 끌고 가 주저앉히는 곳이 있다 일직교회나 조탑리 쪽에서 다가온 바람이 오래전부터 쿨럭거리던 목구멍을 지나 멍 자국 가실 날 없던 어깨와 등뼈를 지나 회초리 자국 희미한 종아리 아래 뒤꿈치에 닿으면, 편석 사이에서 솟구치는 돌칼 바람이 내 헐벗은 자루 속 곰팡이를 탁탁 털어준다 네가 아픈 것은 눈물이 말랐기 때문이라고 밤새 날아가는 새는 늘 눈망울이 젖어있다고 빌뱅이 언덕이 편경 소리로 깨우쳐준다 밟힐 때마다 노래가 되어라 함께 울어줄 곳을 숨겨두지 않고 어찌 글쟁이를 할 수 있으리오 혼자 울고 싶은 곳을 남겨두지 않고 어찌 몽당분필을 잡을 수 있으..
생일 /디미트리 키메리제 나는 1908년에 태어났다 하늘의 태양이 미소짓던 내고향에서.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보낸 그 하루는 나에게 천국 같은 세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내가 자라서 나를 둘러싼 것을 볼 수 있을 때, 불의가 보였고 또한 슬픔으로 세상은 가득했다. 조지아의 어머니는 갇혀서 그녀의 가슴은 말라버렸고 교수대에서 고문을 받고 있는 동료들은 패배하였다. 나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고, 불의에 맞서 싸울 용기를 냈다. 나는 이 죄 많은 땅에서 무장하고 간다. 세상에서 내 편의 사람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나는 적으로부터 불공정하게 패배하여 멀리 가네 날마다 나는 적과 대적하리라 해가진 후 아주 깜깜해 지기 전에. 시인은 걸음 수를 세지 않는다* /체쿠리..
비누 /문정희 명성은 매끄러운 비누와 같아 움켜쥐려 할수록 덧없이 사라진다 오늘 한 시인이 시 한 편을 써서 얻은 이름으로 비누를 사러 갔다 그는 자꾸 향내를 맡아보다가 첫사랑처럼 애틋하고 마지막 사랑처럼 절박한 향을 골랐다 실은 그 향은 한물간 향이다 불꽃을 닮아 입술을 팔랑이는 척하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벼이 사라지는 흔한 거품 냄새였다 비누는 원래 할 말이 많은 돌이었다?* 돌로 여기저기를 팍팍 문지르다가 거품을 주무르다가 물에 녹아 하수구로 사라지는 것이다 세척의 역할 따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명성은 매끄러운 비누의 모습으로 모래 위를 돌처럼 바다거북처럼 굴러다니다가 가뭇없이 바닷물에 쓸려 간다 * 프랑시스 퐁주 - 現代文學 2022년 1월호 숯이 되라 / 정호승 상처 많은 나무의 ..
설원 /홍일표 어디서나 백지는 힘이 세다 출발이며 도착인 곳 영원이라는 말과 가끔 혼동하는 곳 백지는 어디서나 너를 부른다 돌아오라고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나날이 전투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이 얼마나 공갈빵 같은 수사인지 얼마나 머나먼 잠꼬대인지 가장 어려운 지름길을 중얼거리는 백지족 이곳을 떠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사람들은 구름을 오래 씹고 있으면 박하향이 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위로도 위안도 잠시 흩날리다 멈추는 눈발인 양 눈썹에 맺혀 글썽이는 혼잣말인 양 몇몇이 흰 수사복을 걸친 산길 대신 젖은 발자국 많은 곳으로 걸어간다 얼굴을 처음 갖게 된 길들이 등뼈 곧추세우고 반짝이는 다 뭉개져서 마지막 하나 남은 - 시집 '중세를 적다' 민음사 2021 날짜를 짚다 /이만섭 일월의 바큇살은 투명해서 굴..
송년카드 /김명원 겨울을 악물고 있는 수상한 도시가 있다. 빌딩창문들마다 불어오는 잿빛 기침, 실어증으로 입원중인 가로등, 실밥이 풀리는 보도블록, 자동인형처럼 걷는 딱딱한 사람들, 고개 들면, 쑥 자라 있는 어둠의 흉통이 있다. 12월 31일 밤,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 속을 걸으며 주머니 깊숙이에 오른 손을 넣는 순간, 놀라워라 유년의 골목에서 태어난 눈사람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 걸어온다. 나를 다 읽고 있었다는 듯 나를 다 보고 있었다는 듯 강물에 떠내려간 일기장과 조급해진 신발더미와 몇 번의 연애와 소나기를 맞던 결혼식 조화 화환과 사십년 세월이 주름으로 얼룩진 거울과 그리고 엄마, 타다 만 몇 소절 화장터 불길들과 질긴 시詩 한 줌 부스러기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나를 전집의 시선으로 바라본..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 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
꽃물 고치 / 이정록 아파트 일층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 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노처녀다 붕숭아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끝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두 손을 활짝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 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 있다 내각리 옛집 / 이영광 내각리에는 늙은 집들 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 끝나면 불러 모아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