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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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12. 1. 05:55

 

 

송년카드

/김명원

 

겨울을 악물고 있는 수상한 도시가 있다.

 

빌딩창문들마다 불어오는 잿빛 기침,

실어증으로 입원중인 가로등,

실밥이 풀리는 보도블록,

자동인형처럼 걷는 딱딱한 사람들,

 

고개 들면, 쑥 자라 있는 어둠의 흉통이 있다.

 

12월 31일 밤,

내리기 시작하는 눈발 속을 걸으며

주머니 깊숙이에 오른 손을 넣는 순간,

놀라워라 유년의 골목에서 태어난 눈사람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 걸어온다.

 

나를 다 읽고 있었다는 듯

나를 다 보고 있었다는 듯

강물에 떠내려간 일기장과 조급해진 신발더미와

몇 번의 연애와 소나기를 맞던 결혼식 조화 화환과

사십년 세월이 주름으로 얼룩진 거울과 그리고 엄마,

타다 만 몇 소절 화장터 불길들과

질긴 시詩 한 줌 부스러기까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나를 전집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도

차마 보여줄 수 없는 마침표가 있다.

끝까지 적을 수 없던 비명이 있다.

견디고 있는 안녕이 있다.

 

눈길을 오래 걸어와

내 하얀 슬픔의 식민지에까지 이른

눈사람과 눈물이 날 정도로 눈을 오래 맞추자

눈발이 더욱 거세진다.

 

-웹진'시인광장'2021년 9월호

 

 

 

 

 

 

정리

/곽구비

 

다 떼어내고 남은 12월이

용감하게 서 있다

유난히 빼곡한 날짜 안에 빨간 동그라미

특별한 날이 표시를 한 모양이군

건망증이 무서운 게지

앞장들이 뜯겨진 이유를 모른 체

홀가분한 12월이 휘날릴 때

정리를 해볼까 전화번호부를 연다

너는 애매모호해서 지워주고

너는 귀찮아서 지워내고

너는 아무 연고 없으니 지워주마

어느 님 연말정산에 내 이름도

이렇게 떨어져 나갔을 테지

꿋꿋이 달고 있을 이름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잖은가

 

-시집'자연의 들러리로 살고 싶다'청어시인선, 2020

 

 

 

 

 

백 년 만에 내리는 눈

/이선식

 

때론

사는 일이 다 시시하고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

그럴 일 없겠지만

첩첩산중 홀로 사는 시인을 찾아

그녀가 다니러 오는 날

백 년 만에 내리는 눈

눈도 눈도 그런 본 적도 없는 눈이 내리고

세상과 통하는 길이 다 끊어졌으면 좋겠다

먹는 일도 잊어버리고

이불 속에서 서로의 살이나 파먹으며

몇 날 며칠

벌레처럼 꿈틀꿈틀 파고들어

생애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시집 '귀를 씻다'-문학수첩, 2020년 12월

 

 

 

 

............................................................

 

 

*... 흑림엔 일제히 눈이 내렸고, 폭풍 또한 연일 멈추질 않고 있다. 

이 산 저 산, 이 들녘 저 들녘에서

그간 길러온 바람세력을 다 꺼내 놓고 자랑대회라도 하는 듯 하다.

작게는 동네 운동회격이고 크게는 여러 날에 걸친 올림픽격이라고나 할까.

 

창을 여러 겹으로 닫고 잠그고 귀 막고 딴짓을 해도

겨울밤에 찾아든 폭풍은 숨길 수가 없다.

여러 날 폭풍으로 미친듯 울부짖던 숲도 

바람이 잦아들 때면 다시 얌전해 지는데,

폭풍과 대적하여 얻은 전리품처럼

길고 곧은 나무들이 그 접전 지역에 누워 있을 것이다.

 

흑림엔 일제히 눈이 내렸고, 폭풍 또한 연일 멈추질 않고 있다.

폭풍이 멎고 나면

'백년 만에 내리는 눈'을 만날 지 누가 알겠나

애벌레가 되고 ,

애벌레보다 미세한 무엇이 되고,

아니 그 무엇으로도 규정 안 될 만큼 작아져서

생애 이 전으로 돌아갈지....

 

*... 시들, 쓰신 분들께 감사하고

사진은 내 텃밭의 완숙한 겨울꽃들, 지난 주에 찍었다.

 

 

 

 

  • 파란편지2021.12.01 00:19 신고

    "나를 전집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였는지 날이 갈수록 저 자신을, 저 자신의 지난 세월을
    전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시때때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그런 시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2월도 12월이고, 저의 세월도 그렇습니다.
    참 좋은 시를 전해주시는 숲지기님의 월동이 보다 아늑하기를 기원합니다.

    답글
    • 숲지기2021.12.03 23:05

      전집의 시선으로 보기,
      12월이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씩
      허접했던 인생, 전집으로 볼 수나 있으려나 했습니다.

      다행히 코로나는 아니라고 테스팅 결과가 말해주던데요
      어쩜 이리도 독한 것과 조우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병 같은 게 없는 저를 만나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style esther2021.12.01 15:48 신고

    시인이름도 시도 다 새롭습니다.
    어떻게 어디가 좋다고 당장 말하진 못하지만
    묘묘한 감동이 있네요.
    이 시기에 마음을 타악타악 눌러주는 그런...

    답글
    • 숲지기2021.12.03 23:07

      읽고서 좋아서 가져왔는데,
      공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을 타악타악 눌러주는 시,
      에스더님이 시를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워낙 감각적인 분이시라서
      놀라지도 않습니다만 ㅎㅎ

  • Chris2021.12.01 16:02 신고

    시인들은 상상의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뇌가 아주 말랑말랑한 사람들.
    빌딩이 기침하고 가로등이 실어증을 겪고...
    비유를 통해서 독자들이 더 많은 느낌을 얻고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겠지요.
    아니면 자신 역시 모호해져서 비유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든가.
    저는 가슴이 아닌 머리로 시를 읽어서인지 솔직히 내 사고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보다
    그냥 눈으로 그려낼 수 있는 시가 좋아요. "구름에 달가듯 가는 나그네..."^^
    찬 바람 스며들지 않게 창문 꼭꼭 닫으시고
    주홍색 불 옆에서 음악 듣고 와인 한잔 마시며 블로그하는 모습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눈보라치는 흑림에 살고있지 않는자의 상상입니다. ㅎㅎ

    답글
    • 숲지기2021.12.03 23:21

      크리스님께서 어느 시의 어느 대목을 읽으셨을지,
      저도 막 찾아 보았습니다.

      "겨울을 악물고 있는 수상한 도시가 있다.
      빌딩창문들마다 불어오는 잿빛 기침,
      실어증으로 입원중인 가로등,
      실밥이 풀리는 보도블록,
      자동인형처럼 걷는 딱딱한 사람들,
      고개 들면, 쑥 자라 있는 어둠의 흉통이 있다."

      '눈이 오니 마음이 아프다'라는 직설보다
      아픈 환자의 구체적인 증상이 더 시적 설득력을 가지지 싶습니다.
      그냥 읽히는대로 읽으십시오.
      지금은 아니셔도
      다음 기회에 우연히 같은 시를 보시면
      또 다르게 읽으실 겁니다.

      흑림에도 눈이 멎었습니다.
      딱 요 정도로 눈이 좋습니다.
      더 이상 안 오면 참 좋겠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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