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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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정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2. 1. 1. 05:57

 

 

 

 

설원
/홍일표


어디서나 백지는 힘이 세다
출발이며 도착인 곳
영원이라는 말과 가끔 혼동하는 곳

백지는 어디서나 너를 부른다

돌아오라고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나날이 전투인 사람들에게 그런 말이 얼마나 공갈빵 같은 수사인지
얼마나 머나먼 잠꼬대인지

가장 어려운 지름길을 중얼거리는 백지족

이곳을 떠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사람들은
구름을 오래 씹고 있으면 박하향이 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위로도 위안도
잠시 흩날리다 멈추는 눈발인 양
눈썹에 맺혀 글썽이는 혼잣말인 양

몇몇이 흰 수사복을 걸친 산길 대신 젖은 발자국 많은 곳으로 걸어간다 얼굴을 처음 갖게 된 길들이 등뼈 곧추세우고 반짝이는

다 뭉개져서 마지막 하나 남은

- 시집 '중세를 적다' 민음사  2021

 

 

 

 

 

 

 

 

 

날짜를 짚다
/이만섭


일월의 바큇살은 투명해서
굴러가는 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새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싣고 있지
요철 자국 없는 수레바퀴이건만 나날을 더해
계절을 맞이하고 나이를 헤아린다.
누군가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
딱 기억하기 좋은 새날을 기다리다가 오늘을 잊고
약속을 어긴 어제는 얼마나 많은가,
생활이란 끊임없는 명분들의 놀이터
오늘의 생각을 추스르다 들여다본 달력에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
붉은 열매로 익은 공휴일의 숫자를 물고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다.
계산된 날짜에서 멀뚱히 하루를 놓치고
허탈함에 투정을 부리는데
손가락으로 꾹 눌러 달력 속에 주저앉힌 숫자가
일월에 속은 패일까,

 

 

 

 

 

 

 

 

 

당신의 감옥

/문정희

 

 

저녁 어스름 마드리드 골목은 비에 젖고 있다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자리에 앉자 마드리드 시인이 대뜸 물었다

퇴적층을 뚫고 뿌리 하나가 솟았다

군사정권 시절 사형수였던 분이

대통령이 된 후로 TV도 있고 난방도 돼요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범죄가 증가하여 수용이 넘쳐나요

프랑코 시대도 아닌데 정치범? 아님

마약과 성범죄인가요?

어느 시대나 미운 놈은 많죠, 그리고

고통도 자유도 널려 있으니까

그래요, 육신이 감옥이니까

(앗,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작가는 수갑보다 입마개를 더 싫어하죠

오늘은 책의 날, 책처럼 완성된 사물도 없는데

자꾸 밀려나고 있어요

책은 피와 살, 그 속에 숨쉬는 문학은 오래 살죠

시인은 언어의 감옥에서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지요

모든 시인의 노래는 감옥의 노래 아닐까요

쉬잇! 너무 과장 미화하지 마세요

시가 달아나요!

 

- 청색종이, 2021, 가을 창간호

 

 

 

 

 

 

 

 

 

어느 소나무의 말씀

/ 정호승

밥그릇을 먹지 말고 밥을 먹거라

돈은 평생 낙엽처럼 보거라

늘 들고 다니는

결코 내려놓지 않는

잣대는 내려놓고

가슴속에 한 가지 그리움을 품어라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도 굽어보신다

봄이 오면 눈 녹은 물에 눈을 씻고

쑥과 쑥부쟁이라도 구분하고

가끔 친구들과 막걸리나 마시고

소나무 아래 잠들어라

 

 

 

 

 

 

 

 

 

 

 

 

..... 망년을 하는 중인 오늘 12월 31일엔 자주 시계를 본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주어진 시간을 푼돈처럼 막 썼지 싶은데

한해의 마지막날에 이르러 시간구두쇠가 되는 것인지.

우리나라보다 8시간 늦은 이곳 중부 유럽은 

이미 새해에 들어선지 몇 시간이 지난 우리나라에 비해 

여전히 2021년이다.

매년 겪으면서도 이 8시간 동안은 참 묘하다. 

 

..... 수 개월 전부터 함께 하자고 약속을 했지만  

피아니스트친구 카타리나와 프랑크가 코로나에 걸렸었고

나 역시 아직은 후유증이 있으므로 

지인들과 망년회에 이은 신년맞이 축배 드는 일을 취소했다.

 

..... 시들은 옮겨올 때의 생각이 그랬는지

다시 읽다 보니 반성문이 쓰고싶어진다.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난생 처음 홀로 망년을 하는 날,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입술을 반성하고 

목을 씻어내리며

나의 한 해를 빨래 한다. 

 

..... 귀한 시들 댓가도 없이 옮겨온 것에 감사하며

클릭하신 분들께

2022년 새해 행운을 기원드린다.

Frohes Neujahr 2022!

 

 

 

 

 

  • 파란편지2022.01.01 01:45 신고

    새해 첫날이어서 그런지 위의 시들이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눈길을 끌지 않았을 단어들이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눈내린 흑림의 모습도 시와 같았습니다.
    올해엔 그렇게 아프지 마시고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22.01.01 21:00

      고맙습니다 교장선생님.
      환한 사진을 일부러 골랐습니다.
      시들과 맞으면 좋고요, 맞지 않으면
      되려 시에만 집중하여 읽히니 그 또한 나쁘지 않고요.

      여러 번 내린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고
      새 눈이 그 위를 덮고 합니다.
      새해가 특별할 것이 없어서 좋습니다.
      말씀대로 올핸 아프지 말

    • 숲지기2022.01.01 21:00

      았으면 좋겠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도 올핸 부디 건강하십시오.

  • 이쁜준서2022.01.01 08:56 신고

    올 해는 건강하게 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흑림은 참 제설을 깨끗하게 합니다.
    저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 도로는 참 깨끗하게 치워져 있으니
    차 타고 보시는 설경도 멋지지 싶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2.01.01 21:09

      흑림의 제일 근사한 풍경은 눈이 왔을 때입니다.
      대대로 숲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눈계절에도 반팔옷을 입고 혹은 반바지차림으로 마당일을 합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못하고요 ㅎㅎ

      잘 보셨습니다.
      이곳의 제설작업은 참 놀랍습니다.
      눈이 내리면 밤샘작업을 하는지,
      아침엔 늘 도로가 훤합니다.

  • 노루2022.01.01 18:07 신고

    저도, 숲지기님 시 편지의 시구들로
    엮은 모자이크로 인사합니다. ㅎ

    백지는
    영원이라는 말과 가끔 혼동하는 곳

    책처럼 완성된 사물도 없는데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지요
    모든 시인의 노래는 감옥의 노래 아닐까요

    답글
    • 숲지기2022.01.01 21:18

      그렇습니다.
      작가는 수갑보다 입마개를 더 싫어하는 것에 수긍합니다.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도 맞고요.

      시들을 이번달엔 몹시 치열합니다.

  •  
  • Chris2022.01.02 16:27 신고

    저는 백지를 앞에 두면 두렵기도하고
    힘센자 앞에선 약자같은 모습.

    정복자 같은 느낌도 듭니다.
    저항하지 못하는자 앞에 서 있는 폭군 같은 우쭐함.

    약간 가슴이 뛰는 느낌도 옵니다.
    백지에게 나는 첫 사람이라는 것.

    답글
  • 숲지기2022.01.03 00:10

    약자와 폭군은 매우 대조적인데,
    그 두 가지 역할을 한장의 백지에서 해내시다니
    놀라우십니다.
    백지를 보면 저는 그저 조금 흥분을 하고,
    다른 좋은 때를 위해 그것을 서랍 속으로 넣습니다.
    그래서 백지가 수두룩하게 쌓였죠.
    올핸 그것들부터 꺼내어 볼까 합니다.

    답글
  • 고동엽2022.01.03 01:35 신고

    초하루시편 포스팅에 즐감합니다. 사랑하면 언덕 너머의 에덴이 보이구, 사랑할수록 영혼의 키는 커집니다. 임인년 일년내내 행복한날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22.01.04 12:22

      고동엽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다만 에덴은 본 적이 없으니....

  • 계백2022.01.04 07:54 신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정친인, 어른다운 어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진정한 정치인과 어른들도 많겠지만
    세상이 어지러워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품격 있는 선각자와 드러나지 않게 선행하는
    좋은 분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그나마 굴러가고 있습니다.
    숨어 있는 어른들께선 모습을 드러내신 새해를 기원합니다.

    답글
    • 숲지기2022.01.04 12:24

      정치하기가 힘들 겁니다
      요즘 같은 아는 게 많은 사람들 틈에서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tyle esther2022.01.05 18:12 신고

    멋진 사진과 영상에 빠져서
    시는 나중에 다시 와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숲지기님 새해 더 좋은 날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답글
    • 숲지기2022.01.07 17:50

      고마워요.
      에스더님도 올해 더욱 멋진 작품들 만드시고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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