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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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하루 시편지 2021

숲 지기 2021. 10. 1. 00:01

 

 

 

꽃물 고치

/ 이정록

아파트 일층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 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노처녀다

붕숭아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끝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두 손을 활짝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 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 있다

 

 

다행히 앞 차가 서행을 하여 사진 찍기에 그만이다. 속력에 갑갑함을 느꼈는지, 오토바이들이 다 추월하면 또 어때.

 

 

 

내각리 옛집

/ 이영광

내각리에는 늙은 집들 있다

국민학교 시절, 학교 끝나면 불러 모아놓고

서무과 누나가 나눠주던 구호품,

옥수수빵 껍질 같은 지붕을 덮고

'立春大吉'이나 붉은 글씨의 '개조심'

경고문을 써붙인 대문들 아직 있다

세월에 '어름'을 파는 담벼락 허리춤에도

봄날은 다시 와서, 저녁길

어스름 저녁길을 수선하고 있다

뼛국처럼 뽀얗게 스미고 있다

80년대에 학교 다닌 60년대 생,

새 천년에 다시 80년대로 이주한 삼십대들이

일 끝내고 돌아오는 47번 국도

국밥집이 있는 정류장

둥근 흡반의 골목길

감꽃 지는 완자창에 가만히 귀 대이면

한숨 소리 숟가락질 소리

아직도 바깥을 떠돌고 있니

묻는 소리, 시큰거린다

내각리엔 옛날 집들, 옛날 집들 비어 있다

 

 

 

농로 한켠에 마련한 즉석 호박판매대, 원래도 꽃(Blumen)을 꺾어도 좋은 무인꽃판매대인 모양.

 

 

 

 

낙과(落果)

/정호승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그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 시인시대, 2021 가을호

 

 

반대쪽 차선 교통체증 원인은 트럭이네 ㅋ 이 곳의 지방도로에선 아주 흔한 일

 

 

구름

/ 이재무

구름으로 잠옷이나 한 벌 해 입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 밑

이마까지 그늘 끌어다 덮고

잠이나 잘까 영일 없었던 날들

마음속 심지 싹둑 자르고

생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적막의 심해 속 들어앉아

탈골이 될 때까지 실컷 잠이나 잘까

한 잎 이파리로 태어나

천년 바람이나 희롱하며 살까

 

-이재무,'길 위의 식사(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2)

 

세상에나, 아우토반8번의 교통체증은 거의 상습적인데, 왼쪽 차선으로 왔다가 귀가 중이다.보기만 해도 왼쪽은 갑갑, 오른 쪽은 뻥 뚫링 기분.

 

 

....................................

 

 

 

. 오른손 혹은 왼손잡이인지를 아는 방법 가운데 흔히 양손깍지를 껴보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할 때 왼손 엄지를 위에 올리는 나는 영략없는 왼손잡이인데,

글씨쓰기와 칼질 등 살면서 중요한 것에 거의 오른손을 사용하는 나는

잘 단련된 양손잡이.

양쪽 손이 참 잘도 돕고 살아왔다는 것도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한달 전쯤 오른쪽 어깨 사용에 있어 한계를 맞다 보니

나의 이 어줍잖은 양손잡이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되었다.

 

. 딱히 부연할 필요도 없는 술술 읽히는 시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옮겨 왔다.

세상이 엉킨 실타래처럼 보일 때의 독서법이라고나 할까.

소화제 따로 없는 순한 시들이랄까.

 

. 사진들은 헤세의 모교가 있는 마울브론을 떠나오면서 운전 중 찍은 전경이다.

학교를 뛰쳐 나온 어린 헤세가 저 풍경 속 어딘가에서 떨며 밤을 지새웠으리라 생각하니 

다시금 짠해진다. 

 

 

 

 

  • 파란편지2021.10.01 01:14 신고

    이정록 시인은 참 좋은 사람이겠네요.
    이 시만 본다면.

    아, 이 시가 아니었다면 '나쁜놈'이었을 것이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고요.
    제가 사람을 섯불리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만 본다면 좀 치밀하고 까칠할 수도 있는 사람인데
    근본이 아주 곱고 착해서 금방, 돈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시인이랄까? 하여간 그렇다는 것이고
    '그래! 좋아! 나도 이정록 시인처럼 살아야지! 이렇게 살아봐야지!'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답글
    • 숲지기2021.10.02 17:42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생각한 것을 말로 하는 것과
      생각한 것을 시로 쓰 것에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시의 양념으로 해학을 넣은 것인데
      읽기에 따라선 좀 과하다 싶죠.
      양념이란 게 입맛의 호불호가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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