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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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9. 1. 00:35

 

 

9월

/이기철


무언가 하나만은 남겨놓고 가고 싶어서
구월이 자꾸 머뭇거린다
꿈을 접은 꽃들 사이에서
나비들이 돌아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화사했던 꿈을 어디다 벗어놓을까
꽃들이 제 이름을 빌려 흙에 서명한다
아픈 꿈은 얼마나 긴지
그 꿈 얼마나 여리고 아픈지
아직도 비단벌레 한 마리
풀잎 위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다
나뭇잎이 손가락을 펴
벌레의 잠을 덮어주고 있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작은 바람이 생각에 잠긴다
급할 것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올해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바람에 씻긴 돌들이 깨끗해진다
여름이 재어지지 않는 큰 팔을 내리고
옷이 추울까 봐 나뭇잎을 모아
제 발등을 덮는다



 

 

 

 

 

 

컴퓨터 속의 학교

/권영하

 

기다리던 개학을 했다

가방 대신 아이디와 비번을 들고

컴퓨터 속으로 등교를 했다

 

올해는 어떤 살구 맛 같은 짝꿍을 만날까

털복숭아 같은 친구는 다시 만나지 않겠지

휴대폰을 처음 살 때처럼 콩콩 뛰었다

 

교실 문이 열리자 이름들이 꼬물꼬물 나타났다

모니터에 낯선 얼굴들 모두 반가웠다

모과 같다고 날 놀리던 친구도 있었다

가끔 다투던 친구도 날 보고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선생님과 친구들 얼굴만 봐도

모든 수업시간이 너무 맛있었다

온라인 수업은

엄마의 심부름으로 수박을 사 왔는데

갈라보니 속이 빨갛게 익어있을 때와 같았다

 

전원을 끄고도 한참 동안 설레었다

 

- 시와사람 2021/가을호

 

 

 

 

 

 

 

이번 은 기린입니다

/남길순

 

기린은 끌려가는 당나귀처럼 앞발을 버티고 서서 물을 먹어야 합니다 기린은 어느 날 불편한 자세로 물을 마시다가 사자에게 심장을 바치게 되었는데요 그로부터 기린은 황토색 오솔길에 숨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늘 아래 눈 둘 곳은 키 큰 나무와 날아가는 독수리 발톱뿐, 기린의 뒷발차기는 사자의 머리통을 깨고도 남음 직합니다 어느 날 사자로부터 새끼를 지켜내다 자신의 새끼를 뒷발로 차서 날려 보내고 맙니다 초원에 빨간 꽃기린이 피어난 날이었어요 독수리가 발톱을 세우고 이리저리 꽃을 따먹고 있습니다 수컷 기린은 긴 목으로 상대의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는군요 갈고리처럼 얽힌 두 마리가 엉킨 목을 풀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긴 기린이 기린에게 다가갑니다 기린끼리 짝짓기 하는 장면은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기린은 기린이고요 기린 역시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요 기린의 혀는 시시때때로 하늘을 핥아 주어야 합니다 늘어날 대로 늘어난 기린이 목을 빼고 가시나무 잎을 먹는 중입니다 기린에게 사자가 다가가고 있군요

 

 

 

 

 

 

.......................

 

 

 

 

 

....이번 9월 초하루엔 뼛속까지 서정인 시를 앞에 세웠고

마지막 '이번 생은 기린입니다'는 박상순의 '기린'과 비교하며 읽고싶어 모셔왔다.

함부로(?) 옮겨온 시와 시인들께 감사드린다.

 

....지난 8월은 휴가로 채웠다.

재량껏 푸르거나 꽃 피거나 열매 맺는 중인 세상에

뭐라 더 보탤 말도 없어 그 옆 멀찌기서 산책이나 하겠다 했는데

화재와 전쟁소식에 일간지를 껴안고 살았다.

나체달팽이를 양동이에 모아 멀리 개울가에 옮겨놓은 날은 악몽을 꾸었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위협적이었던 그 느낌 만을 기억한다.

달팽이는 내 밭 야채의 어린 잎을 갉아 먹는다.

어떤 경우엔 흔적도 없이 자라던 작물의 뿌리까지 말끔하게 처치한다.

나는 달팽이를 만지지 못한다.

집게로도 집지 못하는데, 이유는 특유의 물컹한 느낌 때문이다.

그들을 상대할 땐 그래서 큰 숟가락처럼 생긴 손삽을 쓴다.

누군가 달팽이 옮긴 죄를 추궁해온다면

달팽이는 손삽이 옮겼다 해야지 ㅎㅎ

....개울가에서 잘 살거라.

....사진들은 8월 마지막 날의 발코니 토마토밭,

비가 막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 숲지기2021.08.31 17:41

    기린
    /박상순
    밤의 바닷가에 앉아 양말을 신는다.기린이 달려오는 것 같다.벗어놓은 웃옷을 걸친다.
    아직도 기린이 달려오는 것 같다.기린이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기다란 목이 바다에서 올라와 밤의 모래밭을 달려 내게로 다가오는 것 같다.육지 쪽으로는 환단 불빛이 아직 빛나고 가끔씩 웅성거리며 몇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검푸른 물 속에서 기린이 나와, 내게로 내게로 달려오는 것 같다.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잘못 된. 그런데도 자꾸 기린이 달려온다. 양말 때문일까. 한쪽 양말을 벗어본다. 그래도 자꾸 기린이 달려오는 것 같다. 나머지 한쪽의 양말도 벗는다. 기린. 어깨에 걸친 웃옷을 다시 벗는다. 기린. 물에서 나온 기린이 모래밭을 건너 내게로 온다. 나뭇잎 같은 별들이 떨어져 기린의 목을 스친다. 달빛이 그물이 되어 기린에게 내려온다. 갑자기 형광등 공장이 보인다. 형광등 공장이 불탄다. 기린이 또 달려온다. 기린. 달빛 그물을 뚫고 기린이 달려온다. 내 앞에. 기린. 눈앞에는 갑자기 형광등 공장이 보이고 형광등 공장이 불타고. 또 달려온다 기린.

    답글
  • 파란편지2021.09.01 01:30 신고

    어? 박상순의 '기린'을 옮겨놓았네? 이 블로그 주인도 이미 다 읽어봤다는데 옮겨놓았네?
    이게 누구지? 아하! 숲지기님이네! 그럼 그렇지~^^
    주제넘지만 이기철의 '구월'은 제 마음을 가져가 시를 쓴 것 같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기철 시인님!)
    권영하 시인도 고맙습니다.
    '컴퓨터 속의 학교'를 이렇게 좋게 표현해주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하루 종일, 여섯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는 아이들은 녹초가 되어
    지켜보는 것만 해도 힘들거든요.
    달팽이를 옮긴 일은 시 같네요.^^

    답글
    • 숲지기2021.09.01 11:36

      컴퓨터 속으로 등교하는 아이들은,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시스템입니다.
      온라인 대학, 온라인 장터 ,온라인 진단에 이어 온라인 애인도 있을 것 같아요,
      있겠죠.
      온라인 아바타에게 입히는 옷을
      유명 의류 매체들이 상품화하고 있다고 읽었습니다.
      시에서는 온라인 얼굴의 밋밋함을 익히아는 다양한 과일 맛으로 구체화 했어요.
      발상은 신선하다 여깁니다.
      그리고 두마리 기린은,
      두편의 시에서 읽고 비교하는 게 재미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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