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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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7. 1. 07:20

 

 

여름 장마

/이병률

 

미안하다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으리라

좋아, 라고 말하지도 않으리라

 

그대를 데려다주는 일

그대의 미래를 나누는 일

그 일에만 나를 사용하리라

 

한 사람이 와서 나는 어렵지만

두 평이라도 어디 땅을 사서

당신의 뿌리를 담가야겠지만

그것으로도 어려우리라

꽃집을 지나면서도 어떻게 살지?

좁은 골목에 앉아서도 어떻게 살지?

요 며칠 혼자 하는 말은 이 말뿐이지만

당신으로 살아가리라

 

힘주지 않으리라

무엇이 비 되어 내리는지도

무엇으로 저 햇빛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공기란(空氣蘭)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았으니

당신으로 살지는 않으리라

물 없이

흙도

햇빛도 없이

사람 없이

나는 참 공기만으로 살아가리라

 

―계간 '시와 표현' 2012년 가을호

 

 

 

 

칸나가 피는 오후
/이이화


하늘거리는 연분홍 블라우스
여미면서
봄날이 떠나간 도로 한 귀퉁이
수다쟁이 여름 붙들어 세워 두고
여자가 도착했다
늘씬한 큰 키에 걸친
푸른 원피스 자락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차창 밖으로 휘파람 날리는 사내들 눈빛이 위태롭다
한 올 한 올 짜내려 간
노른자 같은 시간들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게 당겨지는지
새빨간 립스틱만
자꾸 덧칠하고 서 있는 여자
계절은 지나온 시절을 복사하다가
붉은색 잉크를 엎질러
체감온도 급상승을 찍고 있는데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한낮
타는 목 길게 빼고
싼 티 나는 웃음 치대며
여름을 팔고 있는 그 여자
칸나

 

 '칸나가 피는 오후' 2021 도서출판 그루 시하늘 시선집 2

 

 

 

 

 

 

열무

/김신용

 

채 자라다 만 발육부진 같은,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 같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늙은 것 같은 뿌리를 매달고 저기, 열무가 꽃을 피우고 서 있다. 그래, 세상은 너를 열무라고 부르지만, 너는 열등한 식물이 아니다. 너의 시계는 거꾸로 가지도 않는다. 너는 오직 네 뿌리만큼 작은 숨결을 가지고, 四季가 없는 너의 계절을 만든다. 부드러운 잎과 줄기는 여름 시골 장마당의 열무국수 같은, 그렇게 작은 세계를 꿈꿀 뿐이다. 너의 뿌리는 그런 작은 세계에 머물며, 작은 풀꽃들과 어울려 작은 풀꽃 같은 꽃을 피운다. 그것이 이 지구상에 태어난 너의 의미―. 오직 그것 하나로 뿌리 내려 작은 풀꽃 같은 꽃을 피우며 네가 선 땅을 밝힌다. 그래, 그것이 이 지상에 발을 디딘 이유―, 그러나 네 뿌리를 보면 안다. 그 발육부진 같은 뿌리 속에 어떤 질긴 심이 들어 있는지, 네가 찰나의 섬광 같은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 속을 어떤 강인함으로 채워 놓았는지―. 그래, 어떤 눈물겨운 작은 숨결이 대지에 뿌리를 내려, 그렇게 백치 같은 환한 낯빛의 꽃을 피우고 있는지―.

 

-계간 '백조' 2020년 겨울호 제4호 복간호

 

 

 

 

 

.......................

 

 

....이렇게 서로 다른 시들을 한 장소에 모셔도 되나 싶다.

첫 시의 발표시기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마치 동화마을에 안주하듯,

그 다음과 또 그 다음 발육부진의 현실 열무를 모셨다.

 

....사진의 장소는 독일 슈발츠발트의 작은 도시 빌트밧(Bad Wildbad),

소년이 넋 놓고 바라보는 곳엔 이제 막 물 위에 떠서 물갈퀴 쓰는 연습을 하는 

물오리 아가 두마리와 그들의 어미가 있었다.

물살 거센 산골 계곡에서 막 걸음마를 뗀 새끼들과의 현장학습장이었고

이 와중에 호기심 많은 구경꾼이 있어 어미는 날카롭게 경계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오리가족 사진은 찍지 않았다.

대신 수면 아래의 어미오리 물갈퀴를 보고 말았다.

물이 너무 맑았던 탓에.

 

 

  • 파란편지2021.07.01 15:39 신고

    사진이 엄청 좋습니다.
    사람들이 좋고 그 거리도 좋습니다.
    시를 읽고 싶게 해주었습니다.

    이병률 시인의 시는 언제나 좋았습니다.
    이런 얘기 하기는 쑥스럽지만
    제가 연애를 하는 있다면
    그 여인에게 이병률처럼 시를 써 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이니까
    이병률의 시를 보여주기만 해도
    얼마나 좋을까 싶었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1.07.01 22:40

      연애를 해본 적이 없거나,
      까마득한 옛날일이 되어서 그 실체를 망각한 사람들이 읽으면 공부가 되겠지요.

      교장선생님께선
      '연애를 한다면'이 아니신
      날마다 사모님과 연애하시잖습니까.
      하하
      목하 연애 속에 계신 분들도 연애시를 읽으십니다.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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