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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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4. 1. 05:01

 

 

올해의 사순절

/마종기

 

젊었던 날에는 봄 햇살이 더 밝았다.

밝아서 모든 게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아무데나 누었다.

밤이 되어도 초목은 잠들지 않고

우리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작 우리는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해

어디에 누워도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운 곳은 다 변해 버렸다.

이마에 재를 받은 옛 모습의 몸은

모두들 떠난 것을 이제야 눈치 챈다.

왜 세상이 창백하고 추운지를 배운다.

식물도 기억력이 있다는 중얼거림 속에

숨어서 내 독백을 들어주는 이가

언제부터 주위에 있다는 걸 느낀다.

 

외로울 때는 오히려 더 혼자가 되어

언 땅에 머리 놓고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입 안 가득한 목마름은 무엇인지

목이 마르지 않으면 멀리 볼 수가 없으니

다음 생이 기다리는 것도 볼 수 없으니.

 

그럼 누가 제일 오래 견뎌낸 거지?

우기를 지나 돌아오는 봄날의 감촉,

아내를 피하고 아들을 피하고 나를 피하고

모두가 모두를 피해 도망만 다니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이 아침의 포옹.

 

너와 나 사이로 스며드는 새 시작인가

기죽지 않고 감싸는 봄의 넓은 품인가.

백만 개의 추운 바람은 죽음과 떠나고

화해하는 사순절의 밝은 목소리가

고난의 마을을 지나 우리에게 오는구나.

 

ㅡ '발견' 2021, 봄호

 

 

 

 

 

나비

/장석주

 

봄꽃 진 뒤 여기저기 뒹구는

고막(鼓膜). 바람은 빵을

베어 물고 달린다. 너는 청동

의 말과 함께 돌아온다. 너는

가난한 화부(火夫)가 놓친

불의 작은 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쁨이다. 너는 모래와

금속 알갱이가 아니다. 너는

부드러운 맥박을 가진 양이나

초원에 내리 꽂히는 벼락,

꽃과 꽃 위로 날며 노래하는

백합, 수풀 위에서 빛나는

쓸모없는 금, 아름다운 배[],

부레, 속삭임, 너는 궁핍과

궤양에서 태어나 한없이

가벼운 눈[]의 일생을 산다.

 

 

 

 

 

 

동백꽃

/장석남

 

아흔아홉 개의 빛나는 잎으로는
아흔아홉의 눈 마주친 얼굴들을 비춰 감추어 두네
또 아흔아홉의 그늘 쪽 검소한 잎에는
숨어서 볼 수밖에 없던 사람의 이목구비나 손의 맵시들을,
연중 몇 번 겨우겨우
짧은 햇볕 만나 젖듯 새기어 두네
숨죽여 수년을 묵혀 두면 그 내력 가장 가파른 순서가 생겨
꽃으로 차례차례 올려놓으니 그 빛깔이
정갈한 숯불 같을 수밖에는 없는 일
뻑뻑이 겹친 꽃잎의 메아리여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속으로 치솟아가는 메아리여
일생 사랑의 법칙이 그러하려니
한쪽 귀는 반드시 닫고서
그 곁에 앉아 보네

 

 

 

 

나는 종탑처럼 혼자였다

/허연

 

나비채집을 하거나

타악기 연주자가 되고 싶었다

 

유적지 위에서

염소들에게 소금을 먹이며

소년은 다짐했다

 

다 꿈이었다.

 

종탑처럼

혼자인 소년에게

살아온 날들과

살아가면서 일어날 일들은

한 무더기 필름처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행복했다. 소년이었으니까

 

그때는 모든 날씨가 반가웠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날씨가

두렵다

 

폭음을 한 날 새벽

스포츠 채널에서 해주는

난데없는 경보경기를 하염없이 본다

 

예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장면들이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있다

 

치욕의 냄새와 입맛들

불쾌하지만

이런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날은 온다

인생이니까.

 

생각 많았던 그날의 소년에게 축복 있으라

 

ㅡ'발견' 2021, 봄호

 

 

 

..............

 

 

 

..... 사진들은 여전히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이 과연 꽃이 될까

잘 모르겠다. 

 

 

 

  • 파란편지2021.04.01 01:10 신고

    마종기 시인의 시를 간혹 보곤 했었습니다.
    이 아침 저 시인의 시가 지금까지 읽었던 시보다 이렇게 현실적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에 와 닿아 저를 설명해주고 저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더 읽는 동안 사진 속의 저 가지는 숲지기님의 마음에 들고 싶어하며
    꽃을 피울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1.04.01 13:53

      이 토굴 속 같은 시기를 살아가며 창작시들을 두루 살피는 중에
      위에 말씀해 주신 분의 시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저도 저분 시를 가끔 읽으며
      때론 생각하기를 도덕의 딜레마, 잰틀맨의 우물에 계신 분인가 했었답니다.
      주변의 존경을 받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는 우리 어르신들이 연상되었고요.

      아래 썼던 제 것을 추렸습니다.
      혹시나 제 글을 읽고
      자신의 정서에 탁한 붓질을 하는 이가 있을까봐서요.
      저도 환자입니다 도덕의 딜레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지요.

    • 파란편지2021.04.01 14:17 신고

      "토굴 속 같은 시기"

      6.25 전쟁이 생각납니다.
      전투가 심한 며칠 간 그 토굴 속에서
      밤인지 낮인지도 몰랐습니다.
      대여섯 살 때였는데 그게 잊히질 않습니다.
      숲지기님의 토굴은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른 채 '그렇다!' 짐작합니다.
      이런 시기가 아이들에게는 미안하고
      저로 말하면 억울합니다.
      자연을 망친 걸 생각하면 저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은데됴 억울합니다.

      그 자가면역질환이 도덕 때문이라니...
      남이 알아본다고 좋을 것도 없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게 또 하나의 괴로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여자 동기생이 십여 년 전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제 기세가 등등한 것으로 보였겠지요.
      "절대로 그 꼬리를 내리지 마세요. 제 남편이 그러는 걸 보니까 정말 보기 싫어요."
      그녀의 남편이 꼬리를 내리게 한 건 그녀 자신이잖아요?
      그렇게 해놓고 저더러는 꼬리를 내리지 말라고 했고, 그녀는 제게 말한 걸 잊었을 수도 있지만, 저는 저대로 꼬리를 내리고 살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면서 그게 또 하나의 병이 되었는데
      숲지기님!
      저의 이 병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 숲지기2021.04.01 22:23

      대여섯 살 때면 아주 어린 꼬마소년이셨는데, 마음이 아픕니다.
      전쟁을 단 한번이라도 겪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다른 생을 산다고요.
      이미 오래 전인데도 교장선생님께서도 잊지 못하시듯이 말입니다.
      아픈 기억을 잊으려고 술마시기를 시작한, 아프리카 소녀병이었던 과거를 가진 여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술을 안 마시면 아름다운 숙녀였지만
      술을 마시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동기생이신 분의 일화 재밌게 읽습니다.
      그런데 부부사이시면 일단 '남'이 아니시잖습니까.
      '알아 주는 것'의 중요성이 그래서 더한지 덜한지 저는 잘 모릅니다.
      교장선생님의 고군분투에 대해서도
      멀리서 보면 희극일 뿐인 걸요 하하
      직접 겪고 계신 교장선생님께는 반드시 희극만은 아니라고 하실까요?
      하하 미루어 짐작컨대요, 교장선생님께서도 마냥 행복하고 즐거우실 겁니다.

  • joachim2021.04.01 14:05 신고

    Ich lebe noch, trotz der Impfung mit AstraZeneca gestern,
    fuehle mich gut.

    답글
    • 숲지기2021.04.01 21:53

      Es ist erstaunlich, dass du noch lebst!
      Natürlich bin ich froh, dass du geimpft h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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