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2월 초하루 시편지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2. 1. 05:06

 

문득,

/허수경

 

새싹은 어린 새의 부리처럼 보였다

지난 초봄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왔다

억겁 동안 새들과 여행하면서

씨앗은 새똥을 닮아갔다

새똥도 씨앗을 닮아갔다

붉어져 술이 든 겨울 열매를 쪼면서

아직, 이라는 시간 속에 걸린 잎사귀를 보면서

문득,

새들은 제 깃털을 잎사귀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일이 억겁의 어디쯤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얼음 눈빛으로 하얗게 뜨겁던

겨울 숲을 걷던 어느 날

그 열매의 이름을

문득,

알고 싶었다

새들이 잎사귀를 아리게 쪼다가

잎사귀 모양을 한 깃털을 떨구고 날아간 문득,

숱이 두터운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

날개의 탄생을 붉게 알려준

그 나무 열매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 시인수첩 2014. 봄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 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나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단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단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 아서라 세상사 」라도 들을

류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여성' 1938, 4

-'백석 문학전집1'서정시학, 2013

 

따디기: 얼었던 흙이 풀리려고 하는 초봄 무렵

누굿하나: 눅눅하니

푹석한: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살틀하든: 살뜰하던

아서라 세상사: 판소리 단가<편사춘>의 서두 가사

 

 

 

도시의 눈 -겨울 版畵.2

/기형도
 도시에 전쟁처럼 눈이 내린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가로등아래 모여서 눈을 털고 있다. 나는 어디로 가서 내 나이를털어야 할까? 지나간 봄 화창한 기억의 꽃밭 가득 아직도무우꽃이 흔들리고 있을까? 사방으로 인적 끊어진 꽃밭, 새끼줄 따라 뛰어가며 썩은 꽃잎들끼리 모여 울고 있을까.

 우리는 새벽 안개 속에 뜬 철교 위에 서 있다. 눈발은 수천 장 흰 손수건을 흔들며 河口로 뛰어가고 너는 말했다. 물이 보여. 얼음장 밑으로 수상한 푸른 빛. 손바닥으로 얼굴을가리면 은빛으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그대 소중한 웃음. 안개속으로 물빛이 되어 새떼가 녹아드는 게 보여? 우리가.

   -문학과지성 1989

 

 

 

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번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휜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
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
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
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
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
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
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기형도의 시작노트

 

 

 

.......'눈'의 발음이 짧을 때와 길 때는 그 뜻도 다르다.

그러니까

'눈을 보면 눈이 부시다.' 거나 

'눈 내리는 날은 눈에 눈이 들어 마치 눈물처럼 흐르기도 한다.' 라거나....

급조를 한 두 문장의 '눈'을 함부로 길게 또는 짧게 읽어본다.

 

........장갑 끼고 모자까지 쓴 날의 세상을

눈이 덮었다. 

(입만 가리고) 눈은 가리지 않았어,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미 고전이 되었지만 기형도의 시 두어 편,

눈 오는 정서엔 이만한 것도 없어서 옮겨 왔다.

 

.........동네버스 지나갔다

 

  • 파란편지2021.02.01 01:19 신고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 ... "문득,"을 읽고 옛사람을 한둘 생각했는데
    돌연, 옛시인인가 싶다가 백 년 후에도 그 자리에서 늙지도 않을 듯한 백석이 나타나고
    그해 눈보라가 휘날리는 날 경부선을 타고 내려가던 대전쯤에서 단 한 권의 책 "기형도 전집"의 어느 페이지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시가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오늘은 당장 촌스러워질 것 같았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1.02.01 11:02

      '문득'이라는 시를 읽으면
      맨손으로 양파껍질을 벗기는 기분이 듭니다.
      새싹과 새의 이미지는 만났다가 또 서로 다르게 파생하기를 반복합니다.
      새싹의 씨앗이 새의 똥과 만나고
      부리로 열매를 쪼며
      새의 깃털은 잎사귀를 닮고요.
      급기야는
      '날개를 떨구고(!)' 비상을 합니다.
      날개 없는 비상이죠.


      이런 극적인 설정을 어찌 보셔요 교장선생님?

    • 파란편지2021.02.01 15:29 신고

      제 생각을 슬쩍 끼워놓고,
      되묻지 않으시면 섭섭할 뻔했지요.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참 아름다운 사람
      자꾸 자꾸 변해가는 삶, 그 여정을 따라가며
      사랑하는 길.
      우리는 그런 사랑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는 거죠.
      생각해보면 기억만으로도 충분한......
      "문득,"요.

    • 숲지기2021.02.01 21:53

      블로그나 어디 다른 글에서나 거의 쓰지 않는 단어가 '사랑'이고 또 '고독'입니다.
      그 외에도 더 있을 것 같지만 그 정도로 합니다..
      딴은 자기관리랍시고 굵게 선을 긋지만
      실상은 별 알맹이가 없습니다.
      그냥 빠득빠득 버티는 중이라는 게 옳지 싶습니다.

      감정 언어들과도 말길을 열고
      이웃처럼 오가면 한결 편해질까요.

  • 교포아줌마2021.02.01 15:51 신고

    암담한 이 겨울 날

    이 새벽에 마음을 후비고 들어오는 시들에 쌓이는 호강을 합니다.
    숲지기님^^*

    눈발
    그대 소중한 웃음 ... 새 떼가 되어 녹아드는게 보여?

    대.단.합니다.



    답글
    • 숲지기2021.02.01 22:10

      암담하다 하신 이 겨울 날,
      공감합니다.
      자의든 타의든 빼앗긴 이 들에도
      정녕 봄이 오기나 할 것인지 ......

      아니 올지도 모른다고 씁니다.
      쓰고 나니 더 암담합니다.

    • 교포아줌마2021.02.06 17:18 신고

      어두웠던 마음을 전염시켰네요.
      사과 드립니다.

      요즘엔 뉴스를 껐어요.
      어두운 뉴스들은 더구나.

      아침에 일어나 휠휠 훑어보는 세상 뉴스들에
      전염병, 백신 수혜자들의 불공평한 분배, 열등의식의 백인들 사이에 번지는 파시즘 등등.....

      이런 뉴스들이 어둠 속으로 몰아 넣을 때가 있어서요.

      아직 숲속엔 눈이 많이 쌓였겠지요.

      이곳은 몇 차례의 강풍에 커다란 나무들이 마구 넘어갔어요.

      수선화 히야신쓰등 알뿌리 풀들이 뾰죽하게 돋아나는 날들입니다.

      좋은 날 되시길...^^*



    • 숲지기2021.02.07 00:38

      오,, 아닙니다
      댓글 주신 그대로 저도 다 공감하였습니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지구촌 어디나 조용한 곳이 없나 봅니다.
      신문을 안 봐야 하는데 하면서도
      마치 자석처럼 끌려서 매일 몇 시간씩 새소식에 매달립니다.
      독일도 전염병 대책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결단으로 아주 시끄럽습니다.

      다행인지 눈이 많이 녹았습니다.
      아직 몇 번은 더 내릴텐데
      벌써 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독 힘든 겨울을 겪고 있으니까요.

  • 노루2021.02.02 17:57 신고

    인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형태진화론의 단순 원리를
    '문득' 감지한 거라고 말하고픈
    문학평론가도 있을라나요. ㅎ

    답글
    • 숲지기2021.02.02 23:40

      변이라고 할까요, 성장시라고 할까요.
      인문학 쪽으로 시각으로 보면 한 권 책의 썰은 충분히 펼칠 만한 소재 같고요.

      새싹 닮은 부리를 가진 어린 새가
      깃털같은 잎사귀를 무수히 키우고
      스치는 바람ㅇㅔ 비상을 연습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말 날아갑니다
      문득.

      여기서 좀 모호한데요
      '새이던 당신에게'가 나와서
      열매를 잉태했던 나무와 날아간 새의 관계가 서술됩니다.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4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4.01
3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3.01
2021년 정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1.01
12월 초하루 시편지  (0) 2020.12.01
11월 초하루 시 편지  (0) 2020.11.02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