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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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하루 시 편지

숲 지기 2020. 11. 2. 01:41

 

 

 

그레고르 잠자*에게

/이건청

 

요양병원 906호의 그와

영상 통화를 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그였는데

눈썹이 검은, 앞 머리칼이 왼쪽 이마를 스쳐 내린

그가 맞는데

목소리까지 그대로 그인데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몰랐다.

. . 청 들려주니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되짚어 뇌어본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는 그가 아니었다.

경제학 박사, 메이저 TV 고정 패널,

그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행 KTX를 타는 나를

플랫폼까지 따라와 손잡아주던

손이 따뜻하던 사람,

사람은 그 사람인데

전화기 건너편 영상 속

그의 말이 매듭 밖으로

풀려서 자꾸만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뒹굴고 있다.

 

KTX 플랫폼에 서서

손을 흔들던 지난겨울의 사람,

여름 장맛비 속 영상 전화 화면엔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서 누질러진

그가 망연한 얼굴로 떠 있다.

6개월 사이,

무엇이 사람을 벼랑 밑으로 밀어뜨렸나

 

낯선 사람이 된 그가 건네는 낯선 말들이

깨지고 찌그러진 채 쌓이는

세상의 어느 날, 어느 날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서

당신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영상 통화 화면이 스르르 열리고

그대가 모르는 그대가 뜬다

 

 

* F. 카프카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는 어느 날 잠자리에서 깨어나 커다란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

 

.11월이다.

그 간의 몇달을 어찌 보냈는지 기억도 어렴풋한데

한해 마지막을 한달 앞둔 11월이다.

늘 해 오듯, 이달부터 한해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느라 지낸 며칠을 썼다. 

그 동안 수북했던 가로수 노란 잎들이 다 떨어져 버렸다.

 

지닌 것은 기억 뿐인데,

요즘 같은 시절에는 그마저도 위태롭다는 어제 만난 지인

그 앞에서 언어적인 모든 지식을

망각해 버렸다 나는.  

 

 

 

 

  • 파란편지2020.11.02 00:26 신고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피곤한 채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지내면
    그렇기도 하겠습니다.
    '변신'은 어처구니없다 싶어하며 읽어도 두렵긴 했습니다.
    더러 제 몸을 확인하며 읽었고, 남들이 지금의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객관적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기도 하며..........
    지금 이 시를 읽으며 다시 생각하니까 제가 그 잠자가 아닌가 싶고
    남들이 저를 잠자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다 잠자일까요?

    답글
    • 숲지기2020.11.03 12:48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다 그레고르 잠자 ?",
      눈만 멀뚱하게 내어 놓고 사는 지금은
      잠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입을 가려야 하니,
      우리에게는 어쩌면 말이 필요 없는
      혹은 말을 상실해가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이 몸을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하면
      풀들과 나무들의 언어를
      어쩌면 더 잘 알아차릴 수도 있겠네요.

  • 계백2020.11.02 13:07 신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평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기에 불평과 불공정이 공존한 현실이라
    음지 사람들의 사회적 감정이 폭발한다고 봅니다.
    완전한 공평이란 불가하기 때문에 삶에 익숙해지려고
    자신을 연마하는 느긋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답글
  • 노루2020.11.02 17:40 신고

    반년일지 일 년일지 그 후엔 자신이 '아기'가 된
    딴 사람으로 변신해 있을 걸 알고 준비하는 그 사람,
    그 마음을 --- 시인은 주위에서 본 적이 있었으려나
    모르겠네요.

    답글
    • 숲지기2020.11.03 13:01

      독일에 사는 가까운 한국인 어르신언니는
      다른 그 어떤 병 보다도 치매를 걱정하였습니다.
      병을 앓다가 끝내는 독일말마저 잊으면,
      그의 아들 며느리에게 짐이 되면 어떡하나 하면서요.

      아 그녀는 우리가 만났던 사실도 잊고요,
      좀 지나면 저도 망각하실 것 같아요.

  • 계백2020.11.05 08:37 신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입동을 이틀 앞둔 늦가을의 스산함이 지나
    내년에 다시 가을과 마주하고 끝에 닿을 때면
    함께 걸어온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었노라
    그대에게 가만히 애기할 수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답글
  • 호박꽃의 미소2020.12.05 06:07 신고

    가정하여 생각을 해 보면서도
    ' 그건 아냐..그건 절대 안돼.."
    강한 부정으로 도리질을 해 보아도
    내일 일은 우리 모두가 모르는 일이라..
    앓고 계신 당사자가 만약 해외교민이라면 현지어 혹은 자국어 마저 잊어버린다면?
    정말 더 암담할것 같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0.12.07 16:03

      그쵸, 아는 선배께서 그런 토로를 하시더라고요.
      다른 어떤 병보다도 기억을 잃는 병이 두렵다고요.
      여기가 타국이고, 아들/먀느리도 우리말을 모르니 그 선배 얘기가 와닿았습니다.
      병이 깊어갈수록 스스로의 자존을 지킨다는 개념조차도 망각할테니,
      아아 정말 끔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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