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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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0. 12. 1. 20:46

 

 

 

무심풍경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 계간 '시와 반시' 2008년 봄호

 

 

 

 

 

사과밭에서 온 불빛

/신현림


사람을 만나서 밥과 술을 마셔도

결국은 지는 사과꽃처럼 흩어지고 헤어진다

매일 죽어가는 건 아이들도 알까


매일 다시 태어나도

고요한 자기 안의 길을 못 찾으면

풀죽은 와이셔츠만 걸어 다니고

까만 구두들만 돌아다니네


텅 빈 굴다리를 홀로 건너듯 쓸쓸히

마흔이 되면 나는

죽을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두 손과 두 어깨는 기댈 곳이 없었고

하늘에 구멍은 자꾸 커졌지

태양보다 한숨이 오가는 구멍을 보면서

그저 한심하게 행주처럼 울음을 끌어안고

슬픔을 멈추는 스위치도 없을 때


사과밭에서 온 불빛들이 나를 흔들어 깨웠어

월말, 연말, 종말이 온다는 한계도 생각 못할 때

여기에 내가 있기에 저기는 갈 수 없고

불빛 하나둘을 가지면 다른 불빛을 포기해야 함을 알았네

애를 가졌고 혼자 키워야 했기에

포기한 일과 만남들이 늘어남을 받아들였어

묻지는 마, 다 말하면 가뭇없이 사라지니까

이제 상복을 입은 나날을 애도하고

시커먼 눈발이 쏟아지도록 아픈 시간에 묵념할 수 있네


나는 천천히 흘러가겠네

괴로워야 할 시간은 충분하고

아파야 할 시간이 허다하고

사랑해야 할 시간이 아직도 많으니


―'시산맥' 2013. 겨울

 

 

 

 

 

 

내일, 너를 만났다고 쓴다

/신현락

 

나와 너의 거리는 울다가 말라버린 별빛보다 멀고
낮과 밤이 바뀌는 시간보다 가깝다


너를 잃어버리고 새털 같은 날들이 지나갔으나 그건 상실과 다르다
쏟아지는 페르세우스 유성우 속에서 혼자 깨어 있는
소년의 눈빛을 본다


정답고 쓰라린 대명사들의 주체
네가 없으면 무슨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을까
비릿한 형용사들과 푸른 정맥처럼 돋아나는 동사들의 힘찬 도약은
나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었다
네가 없으면
오늘의 이야기가 과거로 흘러가지 않는다


너의 과거가 나의 현재가 될 수도 있겠으나
이 생에서 너와 나에게 같은 시간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 차이가 울음을 낳고 시간과 비시간을 낳는다
너에게 가는 길에 별빛 흐리다고 해서
오늘에 도착하지 않는 내일 또한 없지 않겠는가


나는 걷고 또 걷는다
돌아보면 대기권에 떨어지는 별똥별
영원한 흐름을 잃어버린 대신
찬란한 현재가 기억 저편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내가 걸어가는 거기에서
어쩌면 너는 이미 나를 지나쳐 갔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이야기가 시차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 이치와 같은 거다


어제는 거기에서 너와 이별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 너를 만났다고 쓴다

 


ㅡ '시산맥' 2020, 겨울호

 

 

..............................................

 

 

 

매년 이맘때면 거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이미 까마득한 날에 어른이 되었지만

크리스마스 장식 상자를 열고 또 초대 손님들을 위한 식탁물건을 정리할 땐

기분좋게 흥분이 된다.

 

작년과 다를 것 없이 여전한 것들에 감사하며

이웃이 되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무엇보다 시를 써준 시인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 이쁜준서2020.12.01 19:14 신고

    무심풍경이
    시인은 이렇게도 보는구나,
    그래 그래 참새들이 나무에 그 작은 발로 온기를 옮기는 것은,
    그 작은 발을 통해서 자연 냉기만 품고 있을 자연 속에서
    얼음장 밑으로 물이 흐르듯 온기를 전해 주어서 그 추운 겨울을 나목으로 견딜 수 있구나.

    코로나 중에도 건강하시고 여전히 일로 바쁘시지요?
    크리스마스를 설레이는 맘으로 기다리시고,
    올 해 크리마스는 모이시지 못하겠지요?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20.12.01 22:30

      올핸 좀 다른 크리스마스를 맞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딘가 싶습니다.
      이쁜준서님께서도 여전히 바쁘시지요?
      옥상의 식물들에게는 겨울채비를 다해 주셨겠지요?

      식물들 편에서 그들을 늘 잘 이해하고 계시는 이쁜준서님께서도
      건강하십시오.

  • 노루2020.12.02 00:05 신고

    역시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울 멋진 사진들을
    봅니다. 둥근 달이 서너 개나 떠 있는 거리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 좀 쓸쓸해 뵈기도 하지만
    그래도 산뜻한 풍경이네요.

    무심풍경에 한참을 -- 저 시의 길이 만큼이나 --
    한눈 팔고 있다 보니 시인의 마음도 담담해진 것
    같아요. 여백의 한국화로 표구할 생각을 다 하다니요.

    신현림 시인이 싱글 맘으로 어린 딸 키우던 시절
    얘기를 읽고나니 그녀의 저 시가 그때를 말하고 있는
    걸 알겠네요. 그때도 또 하나의 '사과밭에서 온 불빛'처럼
    사랑하는 시간이었던 것도요.

    답글
    • 숲지기2020.12.02 22:28

      신현림 시인의 시 창작 배경에 그런 사연이 있었네요.
      어떤 현실 시점은 글로 옮겨만 놓아도 특별한 기록이 되는데,
      지금의 코로나 가 그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의외로 시 쓰는 사람들에겐 이 시대상을 소화하는 것이 더딘지,
      바이러스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시심까지 고갈되었는지,
      독자들은 더 기다려야겠구나 싶습니다.

  • 파란편지2020.12.02 00:37 신고

    처음에 숲지기님께서 고르는 시들을 보았을 때는 은유보다는 직유에
    직설적인 것에 마음이 가는 분인가 하다가
    차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하다가
    지금은 '새 달의 시'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특유의 시들을 골라 보여주시는 것에 제가 익숙해진 걸 느낍니다.
    참 좋은 시들 중의 좋은 시를 보여주시는구나 싶어합니다.
    그 시들이 뚜렷하고 섬세하고 커다란 비유에 공감하고
    마침내 숲지기님께서 보여주시는 시들의 모습이
    숲지기님만의 시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읽으러 오겠습니다.
    그러면서 또 새 달의 시를 기다릴 것입니다.
    즐겁고 고맙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0.12.02 22:49

      다만 시를 더 읽기 위해 시작한 저만의 연재이고요,
      지금도 그 기능때문에 월말에는 집중하여 발표된 창작시들을 읽습니다.
      전엔 일일이 필사를 했지만
      이제는 그냥 옮겨만 옵니다.

      식탁에 앉아 음식상을 맞이할 때처럼,
      시 읽기에도 제 입맛이 있겠지요.
      선입견에 편견 등등의 마치 고질병과도 같은 시야도 가졌을 겁니다.
      그 외에도 순수한 독자로서 읽을 때도 참 근사하지만
      쓰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보다 입체적(?)으로 즐기지 싶습니다.

      늘 느끼지만,
      시를 낳는 사람들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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