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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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정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1. 1. 07:08

 

 

붕어빵 아저씨

/강준철

붕어빵 아저씨가 붕어빵을 뒤집고 있어요. ,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고소한 혁명! 세상도 뒤집어야 골고루 잘 익고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뒤집을 땐 아저씨처럼 번개같이 뒤집어야 해요.

 

보셔요!

미의 여신이 모나리자를 뒤집고, 수련은 미의 여신을 뒤집고, 해바라기가 수련을 뒤집고, 아비뇽의 처녀들은 해바라기를 뒤집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뒤집고 브릴로 상자가 샘을 뒤집지 않았어요?

그 때마다 새로운 꽃들이 피고 사람들이 뒤집어졌지 않아요? 그리고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뒤집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뒤집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베이컨에게 뒤집히고, 베이컨은 데카르트에게 뒤집히고, 데카르는 칸트에게, 칸트는마르크스에게마르크스는베르그송에게베르그송은하이데거에게하이데거는데리다에게 뒤집혔지요. 헌데, 그들은 좀 멍청한 사람들 같아요. 뒤집어 봐야 자기도 또 뒤집어질 걸 모르나 봐요. 그리고

 

이성계가 고려를 뒤집고,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을 뒤집고, 박정희가 제2공화국을 뒤집고, 레닌이 제정러시아를 뒤집고, 모택동이 장개석을 뒤집고 프랑스 시민들이 루이 13세를 뒤집었잖아요? 이분들도 좀 그렀네요. 그런데

붕어빵은 뒤집으면 완성이 되는데 이분들의 뒤집기는 끝이 없네요.

 

모든 것은 언젠가는 뒤집어지고, 뒤집으면 새 세상이 열리는 군요.

그런데 뒤집기를 뒤집으면 완성이 되는지, 뒤집기의 뒤집기는 끊임없이 이어지는지를 잘 모르겠네요.

나도 한번 뒤집어 볼까요? , 내가 뒤집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군요.

 

문득 돌아보니

지구가 몸을 뒤집고 있어요. 그리고

골목에서 봄이 겨울을 뒤집고 있어요.

아아 아 ~

 

시집나도 한번 뒤집어 볼까요?(지혜, 2016)

 

 

 

 

부재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 버렸다

 

차가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시인박물관, 현암사 2005

 

 

 

 

 

연연하면 연연하게 됩니다
/변희수

나뭇잎은 새들이 날개를 사용한 흔적입니까

한 뭉치 새들이 뛰어내릴 때
낙엽이라는 이름의 새 새라는 이름의 낙엽 거리마다
포롱포롱 우수수 몰려다닙니다

이름이 넘쳐납니다
이름 때문에 계절이 바뀌기도 합니다
새에게서 낙엽에게로

추락하는 속도에 문을 닫아주면 겨울이 생깁니다
이름을 부르면 바깥이 쌓입니다
나무의 가장 바깥을 새라고 불러봅니다

흔들리면 흔들리게 되듯
연연하면 연연하게 됩니다

나뭇잎을 구워서 바스락
새의 후렴을 만듭니다
따라가며 지저귀며 빙글빙글 돌며 가끔 손뼉 치며
다시 낙엽에게서 새에게로
나무에서 시작한 이름들은 심장에서 나온 메아리 같은데

명의를 빌리듯
날아가며 극복하겠습니까

명징한 증거처럼 새의 깃털이 떨어진 나무 아래서

짹짹짹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저 새의 혓바닥을 초록초록
뭐,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해도 이해합니다

흔한 옙니다

ㅡ시산맥 2020, 봄호

 

 

 

...................

 

 

-코비19 이전에 쓰여진 시 '붕어빵 아저씨'.

매번 반복하지만 송년하는 일은 늘 드라마틱하다.

한 해를 뒤집기 하는 날

붕어빵의 숙명이 그러하듯 한번 온 새해는 되돌아 갈 수 없다.

2021년이 2020년을 이제 막 뒤집고 있으니

언제 전염병 난리같은 악몽이 있기나 했었나 싶을만큼,

평화롭고 건강한 새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너무나 생소한 망년을 하고 있다.

한국은 몇 시간 전에 이미 새해가 되었지만 

여기 유럽에서 헌해 몇 시간을 홀로 물쓰듯 쓰고 있다.

레드와인 한잔 채워놓고 책상에 앉았다가, 책 목록을 번갈아 훑다가,

겨울 숲 창가를 서성이다가 ....

 

-초대에 갈 수도, 초대를 할 수도 없는 망년에

 

 

 

 

  • 노루2021.01.01 05:55 신고

    김춘수 시인의 "부재"는
    여러 말 늘어놓지 않고 손짓으로,
    한겨울 섬돌 위에서 혼자 놀고 있는
    햇살 한 자락 가리키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 햇살 나도 바라보게 되고
    그러다 내가 햇살인 양 그 자리에
    나앉게 되는 것 같아서
    좋으네요.

    답글
    • 숲지기2021.01.02 11:05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는 첫행에서
      이 시를 다 말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 아래
      꽃들이 소리없이 피고 지고,
      햇살이 졸다가 떠나고,
      사람들이 살다 죽은 것을
      '소리없이' 혹은 '꿈결 같이' 라고 써 놓고는
      그도 그렇게 갔습니다.

      명시입니다.
      이 시는 외워야 할 것 같습니다.

    •  
  • 파란편지2021.01.03 15:04 신고

    '붕어빵 아저씨'를 읽으며 가슴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그 역사의 허망함을 그렇게 살고 죽는 치열함을, 보잘것없는 제 생애를
    노래처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붕어빵 아저씨의 일로 시작해서 다른 피비린내나는 일들이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게 다가왔습니다.
    역사책? 아니, 철학개론 한 권을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시인이란 이런 존재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사족>
    오래 전, 교육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개혁을 부르짖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사람들이 이미 잘 아는 것들을 잘 실천한 인물이 역사적인 인물이 될 리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들도 또 뒤집혔다는 참 허허로운, 재미있는.............. 그런 이야기인데
    그래봤자 또 별 수는 없었던 것이 교육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1.01.03 17:45

      붕어빵 아저씨를 읽고
      감히 말씀드리지만 저도 교장선생님 느끼신 것과 비슷했습니다.
      육안으론 볼 수도 없는 미세한 바이러스때문에 한햇동안 온 정신을 뺏겼던 터라
      이 시가 더 위안이 되었습니다.
      뒤집고 뒤집히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해준 시 덕분에
      코로나도 조만간 뒤집힐 것 같습니다.

      붕어빵이 갑자기 너무 먹고싶은 걸요 ㅠㅠ

    • 숲지기2021.01.03 17:49

      아뇨 교장선생님,
      교육은 늘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개혁의 뒤집기를 한 사람도 교육으로써 깨닫고
      신념을 키웠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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