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3월 초하루 시편지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3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3. 1. 09:28

 

 

부추전
/유종인

삼월 삼일날 부추전을 부친 건
어느 혁명의 소사(小史)에도 없는 일,
그럼에도 당신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에
이 심심한 거사를 부쳐내서는
희고 큰 한 접시 우주에 담아 내놓는구려

야생의 풋것들을 대신하듯
아마 비늘의 궁전에서 모든 아랫도리가 칼을 받아 나온 것들이
이렇게 호주산 밀가루에 버무려
거뭇거뭇 탄 데도 훈장처럼 갖추고 나온 것이
오늘 하루
글이 없는 나를 은근한 사람으로 부추기는구려

당신과 마주 앉아 침묵이 더 자주
젓가락질로 전(煎)을 찢어내는 사이,
세상은 그만큼이나 갈라졌던 국경을 붙여
조금씩 너른 나라로 나아갈 일은 없는가
나는 부추전을 찢어 먹으며 홀로 생각하는구려

더 시들기 전에 어떻게든 구워낸 부추전,
더 파장(罷場)에 들기 전에
마음은 선뜻 어떤 연애의 초록을 뜨겁게 굽자고
방금 옆자리에서 내 영혼과 뺨에
불의 입술을 맞추고 간 전생이
혹 마주앉은 당신인가 하고
당신의 이마에 눈총을 줘보는구려

 

- '시인시대 '2020, 여름호

 

 

 

 

 

당분간

/조용미

 

지루하고 괴로운 삶이 지속된다

집요하게 너는 생의 괴로움에 집중하고 있다

 

생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미혹당했던 적 있었다

주전자의 뜨거운 물이 손등에 바로 쏟아지듯 고통과 환희를 느끼며 펄펄 뛰었다

 

여긴 생이라는 현장이다

이렇게 생생하므로 다른 곳일 수 없다

 

무서운 집중 앞에 미망과 무명이 사나운 개의 이빨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를 바란다

통쾌하다 비명을 지를수록 생은 더욱 싱싱해지고, 생생해지고

 

지루한 열정이 나를 지치게 한다

이 괴로움은 완벽하게 독자적이고 완벽하게 물질적이다

 

누구나 완벽하게 평화롭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의 괴로움에만 집중하는 순교자가 되고 싶다 아름답고 끔찍한 삶이 당분간 지속된다

 

-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

 

 

 

 

 

동백, 섬

/심승혁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을까*

 

그 섬 한번 못 가본 남자

동백 시만 몇 편째다

 

숨죽여 읽던 소리

동백 동백 쌓여

섬이 된 줄도 모르고

 

아직 먼 봄이라며

오늘도 먼 봄이라며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을까

 

추운 노래 붉게 우는 섬 위로

동박새, 희고 둥근 눈웃음을 앉힌다

 

 

* 가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사 변용 

 

 

......................................

 

 

 

 

...하루에 한번은 숲을 또는 들판을 걷고자 한다.

그날의 노을을 보자 하고

해 뜨고 지는 시간에도 민감해 졌다.

날마다 재연되는 라이브 상영인지라 놓치기라도 하면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것이므로

날씨가 맑으면 가능한한 제때에 눈에 넣어두고자 한다.

쓰고 보니 참 작위적이다 싶어 헛웃음이 날 지경인데

사실은 그냥 쏘다닌다.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이맘 때의 버들강아지, 커가는 그 느낌표라도 보고와야 겠어. 

초하루 편지 쯤이야 다녀와서 이어 쓰지 뭐. 

 

....

 

햇살이 다 빠진  2월 말일 늦은 오후

시베리아의 푸른별*을 만났다. 

이 작고 낮게 뜬 별꽃은 

세상에 봄이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푸른 웅변

(핸드폰에 담은 나의 이기적인 일로 저들 중 몇 포기를 즈려 밟았음)

 

...시를 써주신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Blausternchen, Sibirischer Blaustern oder Sibirische Sternhyazinthe (Scilla siberica)

  • 고동엽2021.03.01 03:33 신고

    3월 첫날 온 대지위에 비로 적시며,
    봄 내음새 향끗.
    오늘 휴일도 기쁜마음으로
    멋진 포스팅 합니다 !
    공감 추가합니다

    답글
  • 파란편지2021.03.01 03:36 신고

    '명상''산책' 같은 게 아니라도 그냥 쏘다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귀한 것인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뜰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요.
    세상 어디에 신문 방송도 닿지 않아서 코로나도 침투하지 않는 곳이 아직은 많을 것 같습니다.
    꽃들은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줄도 모르겠지? 모른 채 봄을 맞이하고 있겠지, 하고 바라봅니다.
    심승혁 시인의 마음속에 꽃 피는 동백섬이 들어와 있듯이.

    답글
    • 숲지기2021.03.01 05:42

      꽃 피는 동백섬에 사는 섬주민은
      노래 '꽃 피는 동백섬'처럼 살아갈까요.
      교장선생님 말씀처럼
      이곳도 동백섬에 견줄 만하다 싶기도 합니다.그러나 그건 아주아주 잠깐이고요
      실상은 너무 고독하고
      밤에 무섭고요
      어떤 땐 석기시대를 이 현대에 답습하나 싶기도 합니다.

    • 파란편지2021.03.01 05:49 신고

      밤에 무서운 곳이어도
      낮에는 괜찮으면, 사람들과 회사에서 지내면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저는 밤에는 무섭고 낮이 되어도 고적하고 그런 곳에 살까 생각중이거든요.

    • 숲지기2021.03.01 12:09

      교장선생님께서는 무서움과도 친구되어 잘 지내실 분이십니까?
      저의 무서움의 실체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아주 유치하고 부끄럽습니다만.....
      지렁이나 누에 또 이상한 기어가는 벌레들이 다 무서움의 대상입니다.
      이 정도 수준일줄 저도 오래 몰랐습니다.
      어둠, 높은 곳, 짐승소리,묘지 등등 그 외에도 참 많지만 더 열거할수록 머리카락이 위로 솟습니다.

    • 파란편지2021.03.01 13:06 신고

      무섭지 않다고 최면을 거는 거죠.
      어둠, 높은 곳, 짐승소리, 묘지 등등
      그럴 것 같네요.
      그렇지만 다 별 수 없는 존재들이죠.
      실제로는 지렁이, 누에 등 벌레들은 바라보고 있으면 끔찍한데 우리와 겨루어 서로 살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해치워야 할 대상이 되고 퇴치해버려야지요.
      저는 지금 연습 중이고요.

    • 숲지기2021.03.02 01:22

      제가 느끼는 무서움은 그야말로 '헛것'일 따름일테지만요
      저는 너무나 비논리적입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사로잡힐 땐 그냥 제 정신이 아니기만 했는데
      앞으론 최면을 꼭 걸어보아야 겠습니다.

      사실 여긴 지금 새벽 1시 22분,
      많이 무섭습니다.

    • 숲지기2021.03.02 01:25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긴 한국 귀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멀어서,
      아니면 알아주는 인간이 없어서
      아예 올 생각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 파란편지2021.03.02 06:10 신고

      전에도 귀신을 무섭다고 하시더니...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정말 별 것 아닌 존재가 귀신이거든요.
      대단한 존재로 만들어놓은 문화권도 있긴 하지만요.
      두려운 건 '마음' 스스로 그렇게 주입하는 것이죠.
      낮에 잘 살펴보세요. 그곳은 대부분 더 좋은 곳이잖아요.

  • 사슴시녀2021.06.07 03:55 신고

    ㅎㅎ. 섬뜩한 느낌잘알지요!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느낌 너무 싫어요!
    특히 사람 닮은 귀신은 너무 싫을듯해요!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해만 넘어가면 길에 나가도 차 한대 구경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무섭다 이런생각은 안해봤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사온후론 밤에 집에 혼자
    있었던적이 없었네요! ㅎ

    답글
    • 숲지기2021.06.07 15:33

      뵙기 참 좋습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게 더 자연스럽지 싶고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두분이 새로 쓰고 계신 동화 같은 생활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좋습니다.
      조그ㅁ 전에 사슴님 산 위에서 보신 바닷풍경을 보고 왔습니다.
      정말 멋져요.

      너무 오래 혼자 지냈으므로 혼자
      가 아닌 적을 도무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죠 저는.
      [비밀댓글]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5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5.01
2021년 4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4.01
2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2.01
2021년 정월 초하루 시편지  (0) 2021.01.01
12월 초하루 시편지  (0) 2020.12.0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