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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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1. 5. 1. 01:33

 

붉은 욕이 피는 오월

/박미산

 

 

꽃들은 여전히 피어 하늘을 날고 있는데
그녀들의 대화는 자꾸 발밑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플라토닉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의심에 가득 찬 너의 눈빛은 끈적끈적하다
나는 바다를 말하고 있는데
큰 파도 소리를 담은 너는 모진 혀를 놀린다
너는 향기 넘치는 프리지어를 보고도
노란 히스테리와 구겨진 비명을 한 묶음 담아 나에게 던진다
어제의 사월을 긴긴 시간 탐문하던 너는
풀 한 포기 키울 수 없는 너의 사랑을 마구 뱉어낸다
사월의 끝을 지나 오월이 온다
시를 모르는
사랑을 모르는
장미가 가시마다 붉은 욕을 주렁주렁 매달고
시와 사랑 사이 미묘한 경계에서
발을 헛딛으며 자신을 찌른다

 

ㅡ모던포엠 2020, 5월호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약갱신청구권? 그런 거 다 휴짓조각이라고

자기가 들어와 살 거라고

이사 나가는 날, 마스크 쓰고 들어와 휘 둘러보더니

화장대 위에 못 박은 자리 하나를 짚었다

"사람이 말이야, 남의 집 살면서……."

그예 벽지 긁힌 값 20만원을 받아갔다

엄마야 누나야

난 지금도 날마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해본다

집주인이 정말로 자기 집에 들어와 사는지 보려고

엄마도 누나도 나도 집은 성북구

내 직장은 성동구

말하자면 우리 일가는 카프카처럼

성(城)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셈인데

K는 바둑의 축머리 같은 것일까

아무리 몰아붙여도 나는 여기 있다고

풍선인간처럼 버둥거리는 이 손을 보라고

팔이 저린 쪽을 보면

간밤에 어느 쪽으로 누워서 잤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그레고르의 부모와 여동생은 그 벌레가

자기 아들이거나 오빠라는 걸 어떻게 알아보았을까

엄마, 부르며 다가오는 거대한 다지류(多肢類)는

집주인 같았을까

엄마야 누나야

새로 이사한 집에서 등우량선(等雨量線)을 그으면

장롱 뒤 벽을 타고 창문으로 넘어간다

도둑 같다, 목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금 모든 불안에도 불구하고 내 소설에 매달리고 있다. 마치 동상의 인물이 먼 곳을 내다보면서도 그 동상의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시 쓰는 동안에만 목 위가 살아있는

이 거북목의

실존처럼

지문에는 물과 약간의 염화나트륨과

아미노산, 요소, 암모니아, 피지가 섞여 있다

2년 안에 집주인은 자기 집 게이트맨에

아미노산과 피지를 묻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임하리라

요는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풍 갈 날을 기다리듯

엄마야 누나야 그런데 우리,

강변 못 산다

강 조망권 있는 집은 너무 비싸다

 

* 카프카의 일기, 1912년 5월 9일

 

ㅡ공정한시인의사회 2021, 4월호

 

 

 

 

 

아무도 없는 현관에 불이 켜지는 이유
/고영민

스위치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꽃들이 공중에
불을 환히 밝혀 놓았다

너무 밝나?
이렇게 밝아도 되나, 세상이

이 밝음이 왠지 나는 불안하고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꽃나무 아래
누군가는 묵은 그림자를 몸에 두르고 와
훌쩍훌쩍 울고 있으니

몰래 누가 왔다 가나
아무도 없는 현관에 불이 켜지는 이유처럼

저 나무 아래로
모습도 없이

ㅡ시집 '봄의 정치' 창비, 2019

 

 

 

 

 

 

심연

/구현우

 

작업실에서 새벽을 이해하고 있다

 

레몬차는 식어 단맛이 강하고

세공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작업실에서의 내가

조금 늙어버렸다는 것을 실감한다

 

완성품을 요구한 자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데

 

이 이미지를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공기청정기가 빠르게 돌아가고

새벽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작업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미지가 깨진다

깨진 이미지에

손가락을 베인다

 

새벽은 이상하게 길고

새벽은

그만두려는 생각을 그만둘 수 없게 한다

 

실감한다 작업실의

빈 책상 앞에서 허리가 굽어지고 있다는 것을

 

 

ㅡ 시인시대 2021, 봄호

 

 

 

 

 

...................

 

 

.... 마스크를 상용화하니 얼굴 화장할 일이 없고,

텃밭 봄풀이 자라고부턴 그들로써 생존하니 쇼핑할 일이 거의 없다. 

숲집이 산중의 절 같다는 말을 자주 해왔지만 

숲살이는 절살이가 아니고 무엇보다 나는 중이 못 된다.

숲마당에 자유로이 바람이 다녀가듯 

마음에 다녀가는 생각도 자유로이 두려다가도

덜컥 한 생각에 걸려 넘어지고

그 넘어진 일 때문에 한 나절이 가곤 한다.

 

.... 코로나로 인해 일이 축소되었다.

다른 기회가 있지만, 당분간은 쉬엄쉬엄 그냥 생존만 하기로.

 

.... 5월인데 산중엔 여전히 눈발이 자주 날려서

거실에서 겨울을 난 제라늄을 바깥으로 옮기지 못하였다.

참 겁쟁이다, 제라늄 말고 나....

 

.... 시 쓰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핸드폰의 오작동,

한손은 운전대에, 한손은 위의 보이는 풍경들을 찍을 때

카메라는 풍경과 반대방향을 찍었다 마치 청개구리처럼......

 

웃긴 게, 뭘 저리도 두리번거릴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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