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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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0. 8. 1. 03:08

분장실에서

/장석남

 

오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네

분 뚜껑을 열고 조용히

나를 지우기 시작하네

 

오늘 하루

걷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나를 지워가던 일

 

귀가 길에서 모란의 몰락을 보았네

 

오늘은 아주 조금 나를 걷어낸 것으로 족해

거울 앞에서

얼룩진 부분부터 지우네

저녁은 지워지지 않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0년 여름호

 

 

 

 

어떤 마음을 입으시겠습니까
/이대흠

한 생각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서는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 냄새가 납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갈아입어야 합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을 입고 있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외로움에서는 쾌쾌한 냄새가 났습니다
모든 생각은 소모됩니다 낡거나 때가 묻습니다 아침에 옷장에서 옷을 고르듯 오늘 입을 정서를 골라야 합니다 속에는 아무래도 부드러운 호감이나 자존감을 걸치는 게 좋을 것입니다 우울을 입어도 좋습니다만 날마다 입지는 마십시오 슬픔을 신고 우는 남자는 구입한 슬픔에 만족하는 중입니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오만의 속옷은 감추어도 드러납니다
비굴의 외투는 몸을 옥죄어 숨통으로 파고들 것입니다
날씨가 추울 때는 다정의 외투를 껴입는 것도 좋습니다 이따금은 명랑의 손수건도 나쁘지 않겠군요 근엄의 넥타이를 매셨다면 넥타이의 무게에 무너지지는 마십시오 정서는 껍질일 뿐입니다 트럭을 입고 다닐 수는 없지요 가벼운 기쁨이나 배려의 마음은 언제든 어울리지요
당신이 마련한 기분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떤 마음을 입으시겠습니까?

ㅡ'시와문화'2020, 여름호

 

 

 

 

 

여름밭
/문태준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가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ㅡ 시집'맨발'창비 2013

 

 

 

 

  • 파란편지2020.08.01 02:01 신고

    장석남의 '분장실에서'를 놀라움으로 읽었습니다.
    주제넘을까요?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대흠의 시는 석 줄까지 읽는 동안 이런 시인이 있구나, 했고 그다음 넷째 행부터는 읽지 않고 두기로 했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0.08.01 23:41

      하루 종일 행한 것이
      자신을 지우는 것이라 했습니다.
      무엇보다 몰락하는 모란을 직시했다 했습니다.

      저는 점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일이 편해지고 있습니다.
      약간의 익명성을 보장하니까요.

  • 노루2020.08.05 17:33 신고

    그러고 보니 어느 뒷길 옆 조그만 '여름밭'을 보는 것 같다
    저마다 시 만든다고 일꾼인 그런 밭
    어느 시인은 지나가다 아이들 노는 소릴 들은 것 같다
    "나는 나를 지워가는 중이야"
    "나는 저녁을 지우려는데 잘 안 돼"
    "나는 나를 짓고 있거든"
    어느 시인은 새로 산 슬픔을 신고 맘에 들어 흐느낀다.
    여름밭 한켠의 해바라기꽃들은 등지고 서서 하늘이나 본다.
    귀도 눈도 밝고 맑은 편이 아닌 나는 그러니 그냥 더
    둬두고 볼 수밖에

    답글
    • 숲지기2020.08.06 14:28

      ' 저마다 시 만든다고 일꾼인 그런 밭',
      햐!
      너무 좋습니다.
      노루님도 1등 일꾼이시지요.
      '지나가다가 듣는 아이들 노는 소리'에
      머릿속에 영상이 펼쳐집니다.
      어떤 풍경은 마치 수채화처럼 덧칠이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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