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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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0. 7. 1. 09:08

머위와 여름비

 

 

 

나는 암사마귀처럼
/김개미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풀잎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아
오랫동안 여름이었던 것 같아
나는 풀잎처럼 나뭇잎처럼 바람처럼
호흡까지 맥박까지 초록이었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
너와 헤어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나는 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
아픈 동안에는 더 기다렸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숲에 혼자 있었던 것 같아
한낮이면 햇빛에 녹아 사라지다
저녁이면 바람의 힘으로 단단해지곤 했던 것 같아
눈을 뜨고 있으면 보이지 않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울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아
이슬을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없는 날도 있었던 것 같아
게으르지 않지만 일할 수 없는 날들이
여러 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너에게 함몰되어 있었던 것 같아
이건 네 이야기지만 너는 모르는 이야기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풀과 나무와 바람만 있는 곳에
네 껍데기를 가져다 놓고 있었던 것 같아

 

ㅡ'시와 사람' 2019, 겨울호

 

 

홀룬더 낙화와 익모초와 여름비

 

 

창문이 발끈,

​/성영희

 

창문이 발끈, 불빛이 들어간다

저녁의 불빛들은 모두 창문이 된다

커튼을 치면 안쪽의 의중이 되고

걷으면 대답이 되는 바깥

 

집의 주인은 그러니까 창문의 불빛이다

모든 외출은 캄캄하므로

불빛 없는 창문은 사람이 꺼진 것이다

여름 창문에는 여름의 영혼이 있어

날벌레들이 기웃거리고

겨울 창문에는 서리는 것들이 있어

찬바람이 기웃거린다

오래 전에 기웃거렸던 창문 하나를 우연히 찾았을 때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면

커튼이 걷히고 발끈,

옛 그림자 하나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창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든지

나를 잠그거나 열 수 있는 은밀한

고리 하나를 가졌다는 것이다

 

불 밝히지 않고 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날벌레의 기억이었던가

바람의 틈이었든가

생각하면 여전히 발끈, 치솟는

뜨듯한 기억

 

ㅡ 시집'귀로 산다' 실천문학사, 2019

 

 

 

북스나무(Buchsbaum)와 여름비

 

 

꽃이 시드는 동안​
/정호승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꽃이 시드는 동안 돈만 벌었어요
번 돈을 가지고 은행으로 가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늘의 사랑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었어요
꽃이 시든 까닭을 문책하지는 마세요
이제 뼈만 남은 꽃이 곧 돌아가시겠지요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ㅡ 시집 '당신을 찾아서' 창직과비평사, 2020

 

........................

 

가만 있어서 되나 싶었지만 가만히 있기만 한 나날.

오라할 이도 오겠다는 이도 없는 숲집에도

라일락이 떠났고 나비가 왔고

바람과 안개가 번갈아가며 골짜기의 어깨를 휘감아 보곤 하였다.

 

-첫 시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이라는 독백이 울림이 있어 가져왔고,

-두번짼 '발끈'이라는 단어가 재미있다.

 

가만히만 있지 않으려고 지난 5월부터 카카오톡을 시작하였다.

H언니와 J씨가 친구의 전부이다.

페이스북도 인스타그램도 열었지만

친구는 없다.

무심한 듯 그냥 숲에 서 있기만 하는

나무를 닮아가는 것인지......

 

 

-사진은 내 마당의 여름비와 이파리들

 

 

  • 추풍령2020.07.01 21:55 신고

    아~, 금년도 어느덧 반이 지나고 7월이 되었네요.
    숲지기님은 문학에 조예가 깊어 좋은 시도 잘 찾아내시고 감명 깊은 시들을
    잘 소개하시네요. 문학에 대한 센스가 별로 없고 둔한 이 사람은 그저 어느
    시인이 지은 잘된 글 인가 보다 하고 넘기지요.
    시를 읽고 그걸 소화한다는 것은 교양을 넓히고 정서면에서 좋은 일이지요.

    답글
    • 숲지기2020.07.02 12:22

      시와 함께 하는 삶은 뭐랄까요,
      꽃을 옆에 두는것과 같달까요.
      슬플 땐 꽃이 승화시키고 또 달래주고요,
      기쁠 땐 그 기쁨을 더 격하게 해 주죠.
      설명이 참 어줍잖습니다 추풍령님.
      저는 스물세살때부터 시와는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답니다.

    • 추풍령2020.07.03 19:45 신고


      스믈 세살 때의 꽃다운 시절의 숲지기님,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예뻣을까요?
      그때부터 시를 좋아하셨다니 시를 소화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남다르겠읍니다.
      그때의 감정, 고운 마음 부디 오랫동안 간직하세요.

    • 숲지기2020.07.05 11:38
      23살에 문단에 나갔습니다.

  • shinilc2020.07.02 06:03 신고

    초록초록한 요즘 계절과 어울리는 사진과 시인것 같습니다..
    7월도 초록빛이 펼쳐진 자연을 벗삼아 뜨거운 열정이 타오르는
    하늘과 시원한 흑림의 그늘 아래서 좋은 계절 보내세요~

    답글
    • 숲지기2020.07.02 12:24

      요즘 자전거타기 참 좋아요 그쵸?
      저야 슬슬 타기 때문에
      여름바람을 타며 시상을 떠올리는 일은
      거의 천상의 일처럼 감동이랍니다.
      신일님도 이 여름을 많이많이 즐기십시오.

  • 파란편지2020.07.02 15:27 신고

    오전에 와서 세 편을 읽고 김개미 시인의 저 시를 뽑아 놓았고,
    지금 다시 읽었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시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생각한 것은, 이 시를 제가 밤을 새워 생각하던 그 여인(여성? 아니지 여인!)에게 보여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제가 쓴 시일 경우입니다.
    제게 넘어오지 않고 배길 여인이 없었을 것 같았습니다.
    이젠 다 지나가버린 일이니 그럴 일은 있을 수가 없고(물론 제가 저런 시를 쓸 수 있을 리도 없고)
    이런 시는 노래구나 싶어서 제가 가수라면 이런 노래를 부르겠다 싶었는데
    이것도 또 헛소리일까요?
    하여간 저 시 "나는 암사마귀처럼"은 엄청나게 좋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0.07.03 11:40

      슬픕니다 저도 암컷므로.
      암사마귀처럼 몸도 풀 색깔이 되어
      ,'너' 에 힘몰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너 ' 의 껍데기 뿐이네요.
      슬프고 깝깝하고 한숨이 나오는 정서입니다.
      너무나 한국적인 정서라고
      혹자는 볼 수도 있겠지요.
      저는 몸부터 우리 정서에서 멀리 왔고,
      가능한한 할머님의, 백모님의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과는 달라지고 싶었습니다.

    • 파란편지2020.07.03 15:16 신고

      사실은,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차피 외로운 것이라고 하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면 아주 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에는 나와 너만 남고,
      거기에 너는 언제 나를 어떻게 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 암사마귀처럼.
      숫사마귀가 오면?
      그놈을 잡아먹고 껍데기를 보며 또 울겠지요?

      여기 있었으면요?

    • 숲지기2020.07.05 11:35

      슷사마귀를 잡아 먹고 남긴 껍데기를 보며 울고 앉아 있는 암사마귀가,
      그 생이 측은합니다.
      대단한 반전이고요.
      숫사마귀의 껍데기가 없었다면 완전 범죄였을테니 잔여하는 괴로움도 없었을까요?

  • 추풍령2020.07.06 21:36 신고

    시를 단순히 사랑하시고 애호하는 사이가 아닌
    일찌기 문단에 데뷰하신 시인이시군요.
    시에 남다른 감수성이 짙고 소질이 있는 숲지기님과
    교신을 할수 있다는게 나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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