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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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0. 5. 1. 06:11

 

 

 

 

 

 

오월의 팝콘

/여연

 

팝콘이 만발입니다 남해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몰고 윤중로의 벗나무에서,


꽃을 눈으로 먹습니다 망설이지 마세요 순식간에 5월은 바닥으로 엎어져 봉지, 빈 봉지만 바람에 날립니다 오늘은 팝콘이 터지는 날, 오븐이 달아오르듯 나무들의 체온이 올라갑니다 눈에 넣고 오물거리기 좋은 오월, 잘 익은 팝콘이 하늘로 솟구칩니다


귀가 얼어붙던 아기 돌부처가 피어납니다 지느러미를 끌고 그늘진 계곡을 흘러가던 목어가 피어납니다 산사에 들어가던 발자국에서 팝콘 향기가 피어납니다


길에서 꽃을 먹고 있으면 어느새 따뜻한 봉지에서 하얀 입김처럼 꽃잎들이 솟아오릅니다 꽃잎은 꽃잎끼리 부딪히며 우리의 입안에서 바삭 바삭 속삭입니다 고소한 사랑이 팡팡 터지는 봄날입니다

 

 

 

 

 

 

 

 

 

 

 

발광(發光)하겠습니다

/김선아

 

요란한 울음판이 생을 완결한다지요

절명은 사랑의 자초지종을 울음소리로 가려낸다지요

맹세코 무지했습니다

울음소리를 못 들은 채 덜컥 별세하는 사물들 앞에서

몸서리쳐지는 미완 앞에서

용서를 구하듯 발광하겠습니다

고성능 귀를 달아주겠습니다

지는 꽃이여

지는 꽃의 귀는 울음소리인지 춤인지 노래인지 구분 못 한다지요

울음소리를 끝내 3박자의 춤곡으로 경청하던 꽃이여

남쪽 귀에 든 곡조를 북쪽 귀로 조금만 흘려주십시오

나는 그 울음판 위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며

더 발광하겠습니다

 

 

 

 

 

 

 

 

러시아식 역원근법

/류진

 

쥐를 거대하게 그리고 싶으면
내가 작아지면 됩니다

 
꼬리와 수염을 한 면에 그리려면
꼬리에서 수염에서 지켜보면 됩니다

 
속마음을 베끼려면
그 마음보다 괴로워야지

 
너의 포효가 휘어 내려가서
내 음성도 구부러졌습니다

 
네 마음 무겁다 싶으면
멀어지면 되고요

 

 

ㅡ시집『앙앙앙앙』(창비, 2020)

 

 

 

 

 

 

 

 

 

 

돌의 역사

/최성규

 

누구나 잘 아는 이야기지만
새삼 기억하자면 이렇다
돌들은 한 번도 단단한 자신을
그대로 놔 둔 적이 없다
천하의 모든 것들이
권력과 소유로 살찌고 있을 때
돌들은 오히려
거대한 산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세고 질긴 풍파 속에서
넘어지고 깨지고 굴러 떨어져
자신을 스스로 깎아 내렸다
수 천 수 만 번
파편의 모난 날카로움을 굽히고
짱돌의 폭력을 버리고
둥글게 자신을 연마한 다음
납작하게 엎드린 밑바닥이 되거나
누군가의 든든한 등받이가 되어서
이쯤 되면 굳은 돌의 가슴에서도
화석보다 단단한 석화가 피어난다

 

 

 

 

 

 

 

 

...................

 

 

* .....비소식이 있어서

들깨 모종판을 창가로 내는데

겨우 떡잎 두장 짜리 어린 것에도 깻잎냄새가 난다.

코로나가 다한 뒤에도

창가에 깻잎이 자라야 할텐데 ......

 

* .....팝콘을 들여부은 듯한 산길을 이봄에도 오르내리지만,

고소하지도 않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발음해본 지가 언제였었는지 모르겠다.

고로,

'발광하겠습니다'는 심히 반어적이다.

 

*.....'꼬리와 수염을 한 면에 그리려면
꼬리에서 수염에서 지켜보면 됩니다'와

'돌의 꽃(석화)가 화석보다 단단하다' 는,

견고한 웅변 같은 두편 시도 옮겨왔다.

이 계절에 몇 번 더 읽어서

오그라든 마음의 근육을 녹일 연료로 쓸 생각이다.

써 주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 올린다.

 

.사진은 2020년 흑림의 봄

 

댓글 5

  • 파란편지2020.05.01 02:40 신고

    이미 숲지기님께서 다 얘기해주셨고 주인 맘대로지만
    2020년 오월을 맞은 느낌으로는 "오월의 팝콘"을 갖고 싶습니다.
    일단 전혀 심각하지 않아서 좋고
    누군가 가능한 이라면 곡을 붙여 동요처럼 노래하게 해줄 것 같고
    뻔한 비유라 해도 가난한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이 시에서 아무런 질책 받지 않을 만큼만 마음이 들뜰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월보다는 훨씬 더 좋은 오월이기를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20.05.01 14:57

      시를 읽어도 위로가 되지않는 나날입니다.

      사월보다 좋은 오월,
      지금으로선 딱 어울리고 너무나 바람직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오월 초하루는 비바람에 간혹 눈발까지 날리며 시작합니다.
      여긴 4월 한달 비가 전혀오지 않아서
      감자나 각종 농사가 매마르고 있다 했는데
      이 비에 목을 축일 것이라 여깁니다.
      사람들의 매마른 정서에도
      오는 비처럼 흠뻑 젖을 그 무엇이 내리길 바랍니다.

  • style esther2020.05.01 09:30 신고

    참 좋네요 다양한 시의 언어들이..

    또 오히려 요즘이야말로 이토록 이런 것이었나...하며
    가슴에 쏙쏙 스며듭니다.

    답글
    • 숲지기2020.05.01 15:00

      추워서 난방을 다시 켰는데,
      신문은 펴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가지 주제로만 보도하고 관심을 가집니다.
      이 시기에도 시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 joachim2020.05.01 20:09 신고

    Hi ich hoffe, dir geht es weiterhin gut . Mir selbst geht es auch ganz ordentlich, war gerade 6 Km joggen mit Marla und sitze nun am Schreibtisch und lese: Geschichte der Weimarer Republ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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