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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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0. 2. 1. 00:11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물의 방

/성은주

 

덜 외롭고 싶어
물방울들이 모였다

 
그 방에서
우린 앵무새를 키우고 싶었다

 
책 모퉁이를 접고 바쁘게 움직이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잠시 내려놓았다

 
날마다 뛰어든 물의 방,

 
따뜻했다
여럿이 오래 머물렀다

 
밖에 비가 그쳐도
서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같이 살을 맞대고

 
땀 흘리는 물방울의 이마를 만졌다
물방울은 눈물방울이 되었다

 
누군가 컵을 가져왔고
모두 따라 버렸다

 
빈방이 되었다

 

 ㅡ시인수첩 2019, 겨울호

 

 

 

 

 

 

 

 

첫눈을 소포로 받아 들고

/권현형


흰 소금이다
지나치게 달콤한 독약이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의 한 구절이다


첫눈을 받아들고
소주 한 방울에 라면 국물만으로도
행복, 행복, 행복해서 서글프다
나만으로 행복했으므로 내게 항복할 수밖에


눈이 오길 기다렸다가 운 날, 웃은 날
눈 내리는 숲을 받아들고서 비로소
마음속이 뜨거운 고요로 얼어붙었다

 

 

 

 

 

 

 

멸치의 사랑

​/김경미

 

똥 빼고 머리 떼고 먹을 것 하나 없는 잔멸치

누르면 아무데서나 물 나오는

친수성

너무 오랫동안 슬픔을 자초한 죄

뼈째 다 먹을 수 있는 사랑이 어디 흔하랴

 

 

....................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바이러스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초유의 전염병인 것은 맞고,

감염자는 말 할 것도 없지만, 

감염자도 환자도 아닌 자도 전염력을 지니는지 그 여부로,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축구때문에, 정치때문에, 돈때문에 심히 갈라진 마음을 더 갈갈이 쪼개는 격이다.

이에 시의적절한 나른한 시 몇편 골라,

한숨 쉬어가자, 때는 2020년 2월 초하루.

 

.....곧 입춘에 경칩인데 첫눈 시라니,

지키지 못한 율법에 이미 울어도 웃어도 보았던 이가

숲 앞에 비로소 서 본다 하였다.

 

김경미라는 이름이 흔한가? 언제쯤부터 '대중적'이 된 세 글자이다.

슬픔이 이기적이라 내 걸고, 말미에

스스로 밝아지는 역설로 맺었다. 

중간에 '생존- 불교- 가난-'이 나란한데, 마치 풀로  붙여 놓은 듯 서로 견고하다.

술술 읽히도록 쓰는 재주,

대단하고 부럽다.

 

.....시를 써준 시인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 파란편지2020.02.01 01:57 신고

    숲지기님은 술술 읽히게 쓰시지 않습니까?^^
    괜한 소리를 해보았습니다.
    음력으로 새해 정초부터 몸과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고물이 되어서 그런가? 오늘 아침에는 그런 생각까지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들이 위로를 주는구나 하며 읽었습니다.
    숲지기님은 어떤 생각이었는지, '시의적절한 나른한 시'라고 하셨으니.........

    답글
    • 숲지기2020.02.01 16:09

      아닙니다, 저는 매끄럽게 쓰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정을 하고 또 하여도, 글의 마디가 걸립니다.

      시의적절하다고 쓴 것은요,
      먼저 전염병의 공포에 젖은 분들(저부터)의 뇌리를 좀 쉬게 해 드리고요,
      미리미리 춘곤증을 불러 보았습니다.

  • style esther2020.02.01 10:37 신고

    이기적인 슬픔에 완전 공감합니다.
    좋아서 천천히 따라 읽어봤어요..감사합니다.

    다양한 의견은 당연하다고 애써 마음을 달래다가..
    우리가 아산이다 캠페인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절망속에서 많이 힘드셨죠? 어서오세요.
    아산에서 편안히 쉬시고 건강하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20.02.01 16:28

      너무나 이기적인 저는 작년 이맘때 '플라스틱 안 쓰기'를 며칠간 해보자고
      블로그에도 썼습니다.
      그런데 실천 첫날부터 걸리고, 둘쨋날부터는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겁니다 플라스틱이 없이는요. 보기 좋게 항복하고,글들도 비공개로 해버렸습니다.

      지금은 덜 쓰는 것으로 자세를 바꿨죠 비록 땅콩 만하게 실천하는 것이지만요.
      차 대신 자전거를 많이 타니 관절에도 좋아지네요.
      결과적으론 다 이기적인 것이 되었지만요.

      아산발 환영의 글을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저도 보았습니다.
      꽃 핀 마당을 보듯 좋았습니다.

  • 노루2020.02.01 18:03 신고

    김경미의 '나른한' 수다 ... 친수성 맞을까, 아닐까 ...

    "첫눈을 소포로 받아 들고" ... '시 쓰는 컴퓨터'가 쓰는
    시의 한 구절 같네 ...

    답글
    • 숲지기2020.02.02 22:18

      노루님으로부터 자주 깜짝 놀랐었는데
      '시 쓰는 컴퓨터'에도 눈을 크게 떴습니다.

      잔잔하고 나른하나 구석구석 디테일이 버티는 시들입니다.
      테니스를 매일 치시느라 바쁘심에도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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