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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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0. 3. 1. 00:11

 

 

 

 

 

 

 

 

봄산

/문태준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 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산은 못견뎌라
봄산은 못견뎌라


 

ㅡ불교문예 2020, 겨울호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신현림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이 푸른 나비가 날아다녀요
문은 열어 놨어요
몸이 가벼워질 슬리퍼를 신으세요

 
아무도 없어요 햇살이 흰 눈같이 반짝일 뿐
아무도 우리를 부를 사람은 없어요
어떤 소식도 당신을 무겁게 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아직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고,
빚쟁이도 없고, 먼 바다 고래는
1000개의 비닐을 삼키지도 않았어요
1000개의 비닐이 녹아 수돗물로 쏟아져도
우리 놀라지 말아요 비닐을 안 쓰면 되어요
당신은 용수철같이 너무 긴장하며 지냈어요
일터에 가기 위해 튀어 오를 필요 없어요
제가 안전띠가 돼 드릴 테니

 
방금 끓인 커피니까 천천히 드세요
사약 빛깔의 커피 향은 미치도록 살고 싶게 해요
저는 커피 매니아, 당신 매니아예요
우리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그리웠어요 그리워도 티를 낼 수 없었어요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저는 숨어 있을 거예요
이 기쁜 푸른 나비들을 보시어요

 

 
ㅡ시집 '7초간의 포옹' 민음사, 2020

 

 

 

 

 

 

 

 

미지의 세계

/유병록

 

자주 가는 그 카페는 이층집이다
나는 이층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거나 밀린 일을 하거나 글을 쓴다

 
이따금 잘못 알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다
옥상 출입금지라는 붉은 글씨와 마주친다

 
나는 그 카페의 단골이지만
한번도 옥상에 올라간 적이 없으므로
놀랄 것 없다
그곳에 죽은 구름들의 무덤이 즐비하거나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는 새들이 날아와 안락사당하는 병원이 있다고 해도

 
카페 주인은 친절하고 미소를 잃지 않지만
반정부 단체의 우두머리일지도 모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직원 외 출입금지이므로
놀랄 일 없다
그곳에서 도시 하나쯤 가뿐하게 날릴 수 있는 폭탄을 제조한다고 해도
장물아비들의 소굴이라고 해도

 
나는 주말마다 카페 이층에 앉아 있고
주인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는다
우리의 궁금증은 서로 묵음이다

 
이층에서 내려와 문을 나설 때
우리는 가볍게 웃으며 헤어진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ㅡ창작과비평 2019, 겨울호

 

 

........................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부지불시에 찾아든 이 불청객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는지

여태껏 그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합니다.

예방의 약이나 수칙, 잠복기와 증상 치료기간, 재발 여부 등등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감염현황을 알려주는 알리미에 촌각을 고정한 우리대다수는

그저 불안하고 공포스럽습니다.  

이러한 난국에 '시'를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이럴 때일수록 독서합니다. 

시를 읽으며 '양'보다는 우리 삶의 '질'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벌고 인간성을 벌고 정서를 법니다.  

두꺼운 껍질을 뚫고 피어나는 연초록 잎을 응원합니다.

이렇게 봄은 우리에게 이미 와 있고요,

나날이 초록초록 그 빛을 더해 갈 것입니다.

 

세상에 초록이 좌악 깔리고

제 마당 한구석에 까지 와 깻잎깻잎 조잘거릴 때,

바이러스는 이미 오래전에 정령당해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수고하실 모든 인류에게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위에 시들을 써주신 분들께도 고맙습니다.

 

 

 

 

 

  • 파란편지2020.03.01 02:11 신고

    오늘 시들은 마음을 더욱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여학생이 그런 수채화들 같았습니다.
    '네 번째 시'는 더욱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다시 와서 더 읽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라며.........

    답글
    • 숲지기2020.03.01 15:11

      봄이 이미 와 있어서, 오늘 햇살은 유독 따끈합니다.
      화분에서 겨울을 난 고추포기를 창가에 내다놔 보았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좋아하시던 여학생분, 하하 그 분위기가 벌써 수채화인 걸요.
      네번째 시? 위에 가서 막 찾았습니다 하하

      교장선생님께서도 무조건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 노루2020.03.01 02:36 신고

    봄산, 좋으네요.
    올봄의 첫 개나리꽃을 보는 것 같아요.

    답글
    • 숲지기2020.03.01 15:14

      노루님의 정원에도 봄이 당도했겠지요?
      여긴 엊그제 내린 봄눈이 흔적도 없이 다 녹았습니다.
      앞으로도 몇 번 더 눈이 올 테지만,
      이미 봄이어서 그다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노루님의 능금나무에도 곧 꽃이 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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