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11월 초하루 시편지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1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9. 11. 1. 04:15

 

 

 

 

 

 

 

 


 

 

 

하늘빛이 되는
/위선환 

오직 아낌없이 버리기 위하여
나무들은
그리 많은 이파리를 매달았던 것인지
이 한나절의 잎 지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벌레들은
찬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서
길게 기다리며
얼마나 숱한 울음을 참았던 것인지
사람들은 또 몇 해째나  
잎에 묻힌 길 위에다 길을 내며 걸은 것이고
길이 다시 묻히는 가을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 그루 조용한 나무 밑에 닿는 것인지
문득 쳐다본 머리 위 가지는 벌써
하늘에 젖어있다.
어쩔 것인가. 나무가 맨몸으로
서리 내린 공중에서 잎을 벗는 일이나
벌레들이 흙 속에 엎드리며 숨을 묻는 일이나
사람이
외지고 먼 길을 오래 걷고 야위는 일들이 다
하늘에 닿는 일인 것을
닿아서는 깊어지며 푸르러지며 마침내
하늘빛이 되는, 바로
그 일인 것을

 

 

 


 

 

 

 

 

 

 

 

 

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ㅡ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

 

 

 

 

 

 

 

 


 

 

너였는가 나였는가 그리움인가
/동시영

너였는가
나였는가
그리움인가
시간에 이름을 붙이지 말자
목숨에도 나이를 붙이지 말자
십일월 낙엽보다
더 많이 지는 시간
낙엽붓 들어 순간을 쓰면
텅 빈 있음이 시치미 미소 짓네

ㅡ시집 '너였는가 나였는가 그리움인가'  2017

 

 

 

 

 

 

 

 

 

 

 

 

 

.........................................

 

 

 

-서늘해서 목도리를 했다

이래서 꼬투리의 들깨가 영글겠나 싶은 저녁이다.

오기로 했던 비도 오지 않고

심지어 기침도 멎어.

 

-몸살에 걸렸었다, 별 거 아니지만.

 

 

*사진 배경- 동네 바로크성의 길바닥

 

  • 살며 생각하며2019.11.01 12:54 신고

    안녕하세요?
    요즘 평년 기온에 내주 금 토엔 5도, 6도로 추워진다는 예보...
    쾌청하고 맑아 여행하기 적격인 가을날씨입니다,
    벌써 11월이 시작 되었네요, 즐겁고 기쁜 나날 되세요~~~

    답글
  • 파란편지2019.11.01 14:17 신고

    "십일월 낙엽보다 / 더 많이 지는 시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더러 촉박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형식만 갖추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도 어쩔 수 없으면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저 식물들은 껍질만 벗기면 실토를 하고 맙니다.
    "알맹이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저도 아마 그런 고백을 해야 할 운명인 것 같아서...........

    답글
    • 숲지기2019.11.02 14:54

      어제 텃밭에 추수를 위해 갔었는데,
      고추꽃들이 여전히 피어있고 또 필 준비를 하며 꽃망울들을 맺더군요.
      저는 그들이 바보여서 그러는 게 아닌 줄 압니다.
      고춧대를 뽑아 추수하는 대신,
      그냥 뒀습니다.

  • 노루2019.11.01 17:57 신고

    오늘은 늦은 오후에

    Why did you vanish
    into empty sky?
    Even the fragile snow,
    when it falls,
    falls in this world.

    시인 Jane Hirshfield 가 번역한, 10세기 일본 여성
    시인 Izumi Shikibu 의 이 시를 "딸이 세상을 떠난
    그 즈음 눈이 내렸다가 다 녹아 사라졌다"는 배경
    이야기와 함께 읽고서는,
    시인과는 대조적으로,

    시공간 4차원 내 하늘로 사라져온


    그런 하늘, 그런 사라짐을 떠올리고는, 혼동스럽지
    않고 가볍지 않게 달리 간결히 표현해볼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다 말았는데, 지금 '시 편지'를 여니
    위선환 시인은 또 '하늘에 닿는' '일'을 말하고 있네요:

    하늘에 닿는 ...
    닿아서는 ... 마침내
    하늘 빛이 되는

    (*) 시 번역에 관한 얘기인데, Shikibu 의 저 시 번역에서
    문법상 'the empty sky'라고 해야 하는데 'the'를 뺀 이유는,
    하나는 시의 리듬(소리)을 생각해서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해서 "Shikibu 의 딸은 화장터의 연기 속에 하늘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emptiness' 와 '부재 absence'가 된다,
    그 효과가 관사를 넣으면 약해진다"고 Hirshfield 는 썼네요.

    답글
    • 숲지기2019.11.02 15:05

      'the'를 넣고 말고에 번역가가 고민을 했군요.
      매문장, 단어 수식어마다 고민하는 입장을 이해합니다.

      어떤 절박한 순간은
      진한 잉크물을 적셔놓은 것 같아서
      그냥 진하게 줄줄 써집니다.
      '딸'을 잃고도 써낸 시라면 '시'는 도대체 뭘까 싶습니다.

    • 노루2019.11.06 03:40 신고

      ㅎ 스물 셋 적 이야기가 그새 사라졌네요.

    • 숲지기2019.11.07 23:30

      이게 아닌데 싶어 귀가 후 수정했는데
      노루님 그걸 다 보시고요...............

    •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1월 초하루 시편지  (0) 2020.01.01
12월 초하루 시 편지  (0) 2019.12.01
10월 초하루 시편지  (0) 2019.10.01
9월 초하루 시편지   (0) 2019.09.01
8월 초하루 시편지  (0) 2019.08.0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