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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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9. 10. 1. 00:11

 

 

 

 

 

 

 

 

가을날

/위선환

 

놋대야를 꺼내왔다

한나절 닦았더니 하늘빛이 비치므로

찬물을 가득 담아서

뜰에다 내놓았다

 

비울것도 채울 것도 없다

 

...................

 

 

 

 

미행

/문민수

 

한 사람이 웃었다
공원에 모여 있던 비둘기들도 따라 웃었다

한 사람이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꽃들이 간섭을 했다
한 사람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벌레들이 조마조마 지켜보았다

한 사람이 휙 돌아갔다

꽃들이 웅성웅성 떠들었다

벌레들이 한 사람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무심코 웃었다

 

ㅡ시인동네 2019, 9월호

 

.......................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김이듬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이었고

박수를 칠 때도 박자를 맞췄다

수상작에 대한 논란은 애초부터 없었고

술자리에서 사고 치지 않았으며

요절한 시인들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들이 분명했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연애 사건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죽어버릴 테다

이 문장을 애용하던 그는

외국으로 나다니더니

여행잭자를 출간해 한턱 쏘았다 안 취할 만큼 마셨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빠진 이들

그 시인들은 제 밥그릇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지

신촌의 작업실에서 애들이 기어다니는 방구석에서

날이 밝아올 때까지 하찮아지고 있는지

뭔가 놀라운 한 줄이 흘러나오고 손끝에서

줄기와 꽃봉오리가 환해지는지

중요한 건 그런 게 없다는 것

아무도 안 죽고 난 애도의 시도 쓸 수 없고

수술을 받으며 우리들은 오래 살 것이다

연애는 없고 사랑만 있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그리고 매우 빠르게

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했다

 

 

 

 

 

 

..............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그 영화 속 풋풋했던 소년들은 중늙은이가 되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단어를 알게 해준 영화.

이 단어의 근원이 되는 작품을 옮겨 왔다.

시인 호라츠(Horaz, 기원전65년에 태어나 기원전 8년에 사망)의 시이다.

 

Carmen I,11

Original:

Tu ne quaesieris (scire nefas) quem mihi, quem tibi
finem di dederint, Leuconoe, nec Babylonios
temptaris numeros. Ut melius quicquid erit pati!
Seu pluris hiemes seu tribuit Iuppiter ultimam,
quae nunc oppositis debilitat pumicibus mare
Tyrrhenum, sapias, vina liques et spatio brevi
spem longam reseces. Dum loquimur, fugerit invida
aetas: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

이 시의 번역도 그렇고, 이 시를 페러디한 Christian Morgenstern의 시도 

다음 기회에 올려야 겠다. 

 

*

10월 초하루이다.

새해가 되려면 아직 몇 십일이 남아서

여전히 속주머니가 두둑하다.

 

 

 

 

 

 

 

댓글 12

  • 풍광과
    시들이 너무 좋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9.10.02 02:42

      아시다시피 숲 풍경은 거의 늘 좋습니다.
      바야흐로 가을에 드네요,
      어떤이들은 이 계절에 풍성한 수확을 합니다.
      황승현님께도 넉넉한 계절이 되기를 빌어드립니다.

  • 파란편지2019.10.01 15:19 신고

    문인수의 시는 그의 어느 시보다 더 좋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숲지기님께서 시월 초하루에 보여주셔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지 않는 시인들이 사회'는 시인들 얘기라고 제목에서부터 얘기했는데도
    여느 사람들의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이번 달에도 좋은 시, 시월다운 시를 보여주셔서 읽고 또 읽고 하였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9.10.02 02:49

      문인수님은 늦게 시작하였음에도 시를 참 잘 쓰시지요.
      일설엔 지병으로 인해 불편해 하신다고 듣습니다.
      저도 얼핏 혼란이 왔었는데요, 윗시를 쓴 분은 문민수씨라 합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시를 강의 하는 선생님이 등장합니다.
      그 교실 안에 제가 있다는 생각을 그떈 깜박했습니다.

    • 파란편지2019.10.02 03:01 신고

      "어쩐지요." 하면 안 되겠지요?
      "죽은 시인의 사회"의 국어 시간에 강의를 듣고 있었던 학생 중에
      숲지기님이 계셨단 말씀이죠?!
      "헉!"

    • 숲지기2019.10.02 03:34

      아이쿠 교장선생님......
      제가 영화를 봤던 그 나이에 그 명대사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입니다.
      영화 속 그 풋풋한 소년 시인들을 교우라 여기고 말입니다.

      아주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 파란편지2019.10.02 04:11 신고

      아, 이런! ^^
      제 '아재개그'가 통하질 않았네요.
      "저도 그 교실에 있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서로 몰랐을까요?"라고 할 걸......

    • 파란편지2019.10.02 04:14 신고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얼어나시고 그러세요?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아니면 특별한 아침인가요? [비밀댓글]

    • 숲지기2019.10.02 04:23

      교장선생님,
      좋아하는 숲에서 길을 잃었고 그러다가
      어두어졌고 소나기까지 내렸던 것이 벌써 몇 시간 전이 되었습니다.
      저 같은 겁보에겐 그 상황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어서
      스스로 달래고 있습니다.
      이제 자야죠.
      행운의 하루를 맞으십시오. [비밀댓글]

  • 노루2019.10.02 03:44 신고

    뜰에 내놓은 찬물 가득 채운 놋대야에
    하늘 한 조각, 그리고 운 좋으면 잠시
    태양도, 담아두고 위도 보다 아래도 보다
    유유히 'carpe diem' 하는 시인의 모습이라니요.

    답글
    • 숲지기2019.10.02 04:00

      길을 잃고 숲을 쏘다니던 중에
      노루님을 생각했습니다.
      선물을 주고 또 받으신 두분, 행운을 누리셨다고 생각되고요
      참 부러웠습니다.
      [비밀댓글]

    • 숲지기2019.10.02 04:07

      기원 전에 썼던 문장이지만 오늘날에도 빛납니다.
      Carpe Diem.....
      찬물 담은 놋대야에서 (노루님 좋아하시는 )노을이 뜬 걸 본다면
      온 하루를 기다릴 만 하지 싶습니다.
      그 때 Carpe Diem이라 말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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