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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하루 시편지 2021

숲 지기 2021. 11. 1. 09:21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 이영광

자고 난 뒤 돌아앉아 옷 입던 사람의 뒷모습처럼

연애도 결국은,

지워지지 않는 전과로 남는다

가망 없는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

사랑은 내게 왔다가, 이렇게

가지 않는 거다

증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교정의 단풍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동안

이곳이 바로 감옥이구나, 느끼게 만드는 거다

사람을 스쳤던 자리마다

눈 감고 되돌아가 한 번씩 갇히는 시간

언제나 11월이 가장 춥다

모든 외도를 지우고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이 추위는 혼자서 마쳐야 하는 형기?

출감확인서 같은 졸업증명서를 기다리며

외따로 선 나무 아래 외따로 앉아 있는

추운 날

붉고 뜨거운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다

혼자 불타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타오르는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순간이 있고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과

멍하니, 갇힌 사람이 있고

인간의 습성을 비웃으며 서서히 아웃되는 새떼들이 있다

- 이영광 '직선 위에서 떨다' 창비 2003

 

 

 

 

 

 

 

 

꽃의 북쪽

/우대식

 

개구리도 겨울잠에 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밤

마쓰오 바쇼,

이런 날은 늘 바람이 창호 문을 두드렸지

화로에 술을 데우도록 하지

낡은 신발은 방 안 머리맡에 놓아두도록 하지

왜 마음이란

천리만리 달아나는 것인지

조금은 뜨거운 술을 천천히 내장에 붓고

매화나 동백 같은 꽃을 기다리기로 하지

아니면

꽃의 북쪽으로 달아날까

신음처럼 그대가 내게 물을 때

나는 절망의 심줄을 활시위처럼 당겨

심장 가장 먼 뒤쪽으로 모든 생각을 모으곤 하지

마쓰오 바쇼,

조금 추워도 되겠지

유여한 봄빛이 마루 구석 쌀통에 넘칠 즈음이면

안개와 연기는 강줄기를 따라 무진무진 흐르겠지

그대와 나도

이쯤에서 안녕이지

연기를 좋아하는 나와 안개를 좋아하는 당신

바람이 올 때까지만 지상에 기대기로 하지

이쯤에서 안녕이지

 

-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2021

 

 

 

 

 

 

 

바깥으로

/최문자

 

그해

어느새 나는 흰머리가 나고

바깥은 반짝거리고

나는 밥 먹다 자꾸 밥알을 흘리고

 

이제

이 나이는 축축하다

잘 익은 기도 냄새만 난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들길 같았어

 

아이들과 엎드려 자면서

꼭대기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었지

기둥 같은 꿈을 꾸며 기쁘게 알을 낳았지

덜 자란 실눈을 뜨고 엉엉 울며 알에서 나오던 아이들

 

어젯밤

나와 나의 커다란 알들의 기도는 거꾸로 이루어졌다

서로 사라지는 법을 익히며 바깥으로 헤엄쳐가고 있었지

어슬렁거리는 나를 지나

 

내가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자꾸만 굽어지는 골목

구름 한 점

시시한 일까지

우우 무서워

 

- 서정과현실, 2021 하반기 호

 

 

 

 

 

 

 

 

 

감정손해보험

/이종섶

 

노후에 맞닥뜨리게 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노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날 사고처럼 다가올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손해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보험료를 지불한다

 

성실한 납부자, 그러나 가난한 납부자

돈이 많다면 감정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니 실비 보상정도의 감정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된다

 

혼자라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이대로 흘러가면 어느 순간 감정의 대형 사고에 직면하게 될지 몰라,

그 내상의 두려움을 아는 자로서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이 그때마다 보험료를 인출할 것이다

감정보험에 일찍 가입해서 다행이다

 

오늘의 감정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 문파, 2021 가을호

 

 

 

 

 

...........................

 

... 한 해를 두고 보면 11월만큼 존재감이 없는 달은 없다.

좀 이르다 싶게 내년을 계획하는 것은 그나마 양호하다.

코 앞에 온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거나 연말을 생각하느라 11월을 탕진하기 일수이니

11월엔 11월이 없다.

11월을 살아도 이게 어디 11월을 사는 것이어야지.

 

... 감정손해보험, 뭐 이런 시 제목도 있구나 싶다.

감정에 관한 한은 나도 할 말이 있던 터인지라,

읽지도 않고 보쌈해 온 시.

 

... 몇년씩 꼼짝않고 정비만 받아왔던 오래된 본모빌(Wohnmobil)에서 

친구 몇 불러서 놀았다.

공교롭게도 헬로윈데이였던 것 까진 좋았는데

열애에 빠진 친구 레나테가 애인과 함께 나타난 것은 덜 좋았다.

 

 

 

 

 

 

  • Chris2021.11.02 14:10 신고

    '애인'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좋구 없으면? 어쩔 수 없지요.
    저는 말랑말랑하고 털이 북실북실한 녀석을 18년간 품속에 안고 살다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간지 한참 되는데, 아직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애인 역할을 대신해 주었나 봅니다.
    저의 이야기니 일반화 시켜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ㅎ

    답글
    • 숲지기2021.11.02 14:47

      녀석님,장수 하셨습니다.
      그 정도의 수명이면,
      정말 축복받은 생활 살고 갔지 싶습니다.
      전 아주 어릴 때 경험했고요,
      거의 한 학기 정도를 웃지도 않고 지냈습니까요.
      지금도 그 감정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리면 애인은 아니었고요 애견 하하

  • 파란편지2021.11.03 00:13 신고

    "지워지지 않는 전과"
    "모든 외도를 지우고 / 단 한사람을 기다리는 일만으로 버거운 사람에게"
    시인은 가슴속에 쓰레기처럼 남아 있는 것들을
    저렇게 내거는 힘을 가졌구나 했습니다.
    '단풍나무 한 그루의 세상'
    어쩔 수 없이 단풍나무가 되어 있는 제 이야기인 것 같았습니다.
    11월처럼, 아니 어쩌면 12월처럼...

    답글
    • 숲지기2021.11.04 00:09

      단풍 든 나무를 보고 죄나 죄의 기억을 떠올리다니요.
      지워지지 않는 전과, 감옥,형기,출감.....등은 어떤 행위의 결과라 하더라도
      '떨어져서도 여전히 화끈거리는 단풍잎'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잖아요.
      멍하니, 갇힌 사람으로서 바라봅니다.
      반어 직유 은유가 아낌없이 참여하고 있죠.

    • 파란편지2021.11.04 11:32 신고

      '쓰레기'는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응겹결에 그렇게 썼으니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꺼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어떻게 하지도 못할....

    • 숲지기2021.11.04 19:56

      죄 지어서 옥살이 하는 것 보다는
      '쓰레기'가 도덕적입니다.
      마음속에 단풍잎을 담는다면,
      언젠가는 쓰레기가 될 단풍잎을 담는다면요,
      마음은 쓰레기통이 되겠죠.

      나뭇잎 쓸어담는 노동을 매년 해야만 하는 사람들 또한
      저 시를 달리 해석할 것 같아요.

  • 파란편지2021.11.05 12:20 신고

    마쓰오 바쇼나 저 시인처럼 저렇게 멋스럽지는 않지만
    안개로 유명한 저 안동시에서(밤안개를 노래한 가수가 떠오릅니다)
    주로 여학생들에게 무용을 가르치던 교수님과 함께 길거리에서 정종을 마시던 늦가을 저녁이 있었습니다.
    강당 귀퉁이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그 여학생들 레슨을 마치고 둘이서 시내로 나가
    참새 고기와 정종을 파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아, 저도 학생이었습니다.
    그분은 강당 귀퉁이를 막아놓고 거기에서 쓸쓸하게 지내시다가 쓸쓸하게 가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답글
    • 숲지기2021.11.05 15:48

      저는 바쇼의 시를 모르지만,
      저 시에서 가끔씩 넣은 것이
      마치 나무의 이름인 듯,
      현악기의 음률인 듯잘 어울립니다.
      저만의 시 감상 법이니까요.

      안동에서 조우하셨던 분과의 일화는,
      더 연이어서 읽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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