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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10)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그레고르 잠자*에게 /이건청 요양병원 906호의 그와 영상 통화를 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은 그였는데 눈썹이 검은, 앞 머리칼이 왼쪽 이마를 스쳐 내린 그가 맞는데 목소리까지 그대로 그인데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몰랐다. 이. 건. 청 들려주니 한 글자 한 글자 겨우 되짚어 뇌어본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는 그가 아니었다. 경제학 박사, 메이저 TV 고정 패널, 그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행 KTX를 타는 나를 플랫폼까지 따라와 손잡아주던 손이 따뜻하던 사람, 사람은 그 사람인데 전화기 건너편 영상 속 그의 말이 매듭 밖으로 풀려서 자꾸만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뒹굴고 있다. KTX 플랫폼에 서서 손을 흔들던 지난겨울의 사람, 여름 장맛비 속 영상 전화 화면엔 치매 전문 요양병원에서 누질러진..
안개는 힘이 세다 /우대식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 옹호자가 나온다 조금 있다가 자본주의자가 나온다 안개 속에는 많은 주의자들이 산다 안개 속에서 사회주의자인 체하는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교회주의자인 체하는 완전 자본주의자가 걸어 나온다 안개가 걷히면 자본주의자만 남았다 그게 뭐 대수냐고 누군가 중얼댔다 나는 자본주의는 힘이 세냐고 물었다 자본주의자들은 슬그머니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눈이 쏟아지고 앞을 볼 수 없었다 눈도 자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안개 속에서 허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는 고맙다 ㅡ'애지' 2020, 가을호 취한 사람 /이나혜 취한 사람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세상에 없느니 군청색 그리스 바다 냄새가 나고 전봉건全鳳健의 시에서 낮은 트럼펫 소리가 나고 옆 테이블의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
저물녘에 /위선환 한 때는 나무가 곁에 있어서 손에 짚이고 등에 닿았다. 나무 아래 서면 야위고 뒤켠은 쓸쓸하고 밑둥치 를 베고 아팠으므로 가지에다 팔짱을 얽거나 기대앉아 발을 뻗거나 땅속 그늘에다 가슴살을 묻어야 울 수 있었다. 지금은 줄줄 비가 내리고 나무는 젖어서 빗물이 흐르고 당신은 물투성이로 빗속에 서서 비 맞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지없이 기다린다. 사람과 나무가 비에 젖는 나무와 사람을 바라다보며 마주서서 비를 맞는 그리움에 대하여, 이름을 부르지도 안아들이지도 못하고 오직 젖으며 같이 어두워지는 절절함에 대하여, 언젠가는 당신이 목소리를 떨며 말해줄 것이므로. 북쪽 하늘 별 옮겨 앉듯 /장석남 하루를 탕진하고 별을 본다 후후불면 숯불처럼 살아나거라 피리를 불랴 ? 살아나거라..
분장실에서 /장석남 오늘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족해 중얼거리며 거울을 보네 분 뚜껑을 열고 조용히 나를 지우기 시작하네 오늘 하루 걷고 먹고 말한 모든 것이 나를 지워가던 일 귀가 길에서 모란의 몰락을 보았네 오늘은 아주 조금 나를 걷어낸 것으로 족해 거울 앞에서 얼룩진 부분부터 지우네 저녁은 지워지지 않네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0년 여름호 어떤 마음을 입으시겠습니까 /이대흠 한 생각에 오래 매달려 있는 사람에게서는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은 냄새가 납니다 슬픔이건 기쁨이건 갈아입어야 합니다 몇 달 동안 외로움을 입고 있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외로움에서는 쾌쾌한 냄새가 났습니다 모든 생각은 소모됩니다 낡거나 때가 묻습니다 아침에 옷장에서 옷을 고르듯 오늘 입을 정서를 ..
머위와 여름비 나는 암사마귀처럼 /김개미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풀잎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아 오랫동안 여름이었던 것 같아 나는 풀잎처럼 나뭇잎처럼 바람처럼 호흡까지 맥박까지 초록이었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 너와 헤어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나는 너를 기다렸던 것 같아 아픈 동안에는 더 기다렸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숲에 혼자 있었던 것 같아 한낮이면 햇빛에 녹아 사라지다 저녁이면 바람의 힘으로 단단해지곤 했던 것 같아 눈을 뜨고 있으면 보이지 않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암사마귀처럼 오랫동안 울지 않고 있었던 것 같아 이슬을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일을 생각해낼 수 없는 날도 있었던 것 같아 게으르지 않지만 일할 수 없는 날들이..
나방이 풍경을 완성한다 /정현종 넓은 창 바깥 먹구름 떼 쏟아지는 비 저녁빛에 젖어 큰바람과 함게 움직인다. 그렇게 싱싱한 바깥 그 풍경 속으로 나방 한 마리가 휙 지나간다 -. 나방이 풍경을 완성한다! 분꽃이 피었다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悲哀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농담 한 송이 /허수경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
오월의 팝콘 /여연 팝콘이 만발입니다 남해를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몰고 윤중로의 벗나무에서, 꽃을 눈으로 먹습니다 망설이지 마세요 순식간에 5월은 바닥으로 엎어져 봉지, 빈 봉지만 바람에 날립니다 오늘은 팝콘이 터지는 날, 오븐이 달아오르듯 나무들의 체온이 올라갑니다 눈에 넣고 오물거리기 좋은 오월, 잘 익은 팝콘이 하늘로 솟구칩니다 귀가 얼어붙던 아기 돌부처가 피어납니다 지느러미를 끌고 그늘진 계곡을 흘러가던 목어가 피어납니다 산사에 들어가던 발자국에서 팝콘 향기가 피어납니다 길에서 꽃을 먹고 있으면 어느새 따뜻한 봉지에서 하얀 입김처럼 꽃잎들이 솟아오릅니다 꽃잎은 꽃잎끼리 부딪히며 우리의 입안에서 바삭 바삭 속삭입니다 고소한 사랑이 팡팡 터지는 봄날입니다 발광(發光)하겠습니다 /김선아 요란한 울음판이 ..
이 독성 이 아귀다툼 /최영철 우울한 실직의 나날 보양하려고 부전 시장 활어 코너에서 산 민물장어 건져놓고 주인과 천 원 때문에 실랑이하는 동안 녀석은 몇 번이나 몸을 날려 바닥을 포복했다 집이 가까워올수록 제 마지막을 알았는지 비닐 봉지 뚫고 새처럼 파닥였다 물 없는 바닥을 ..
봄산 /문태준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 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산은 못견뎌라 봄산은 못견뎌라 ㅡ불교문예 2020, 겨울호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신현림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이 푸른 나비가 날아다녀요 문은 열어 놨어요 몸이 가벼워질 슬리퍼를 신으세요 아무도 없어요 햇살이 흰 눈같이 반짝일 뿐 아무도 우리를 부를 사람은 없어요 어떤 소식도 당신을 무겁게 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아직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고, 빚쟁이도 없고, 먼 바다 고래는 1000개의 비닐을 삼키지도 않았어요 1000개의 비닐이 녹아 수돗물로 쏟..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물의 방 /성은주 덜 외롭고 싶어 물방울들이 모였다 그 방에서 우린 앵무새를 키우고 싶었다 책 모퉁이를 접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