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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02)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봄산 /문태준 쩔렁쩔렁하는 요령을 달고 밭일 나온 암소 같은 앞산 봄산에는 진달래꽃과 새알과 푸른 그네와 산울림이 들어와 사네 밭에서 돌아와 벗어놓은 머릿수건 같은 앞산 봄산에는 쓰러진 비탈과 골짜기와 거무죽죽한 칡넝쿨과 무덤이 다시, 다시 살아나네 봄산은 못견뎌라 봄산은 못견뎌라 ㅡ불교문예 2020, 겨울호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신현림 당신이 나를 부를 때까지 이 푸른 나비가 날아다녀요 문은 열어 놨어요 몸이 가벼워질 슬리퍼를 신으세요 아무도 없어요 햇살이 흰 눈같이 반짝일 뿐 아무도 우리를 부를 사람은 없어요 어떤 소식도 당신을 무겁게 하지 않을 거예요 오늘은 아직 아무도 자살하지 않았고, 빚쟁이도 없고, 먼 바다 고래는 1000개의 비닐을 삼키지도 않았어요 1000개의 비닐이 녹아 수돗물로 쏟..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김경미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사는 게 다 힘든 거야 그런 충고의 낡은 나무계단 같은 삐걱거림 아닙니다 내게만, 내게만입니다 그리하여 진실된 삶이며 사랑도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리라 아주 이기적으로 좀 밝아지는 것이지요 물의 방 /성은주 덜 외롭고 싶어 물방울들이 모였다 그 방에서 우린 앵무새를 키우고 싶었다 책 모퉁이를 접고 ..
겨울 연못 /장석남 얼어 붙은 연못을 걷는다 이쯤에 수련이 있었다 이 아래는 메기가 숨던 까막돌이 있었다 어떤 데는 쩍쩍 짜개지는 소리 사랑이 깊어 가듯 창포가 허리를 다 꺾이었다 여름내 이 돌에 앉아 비춰보던 내 어깨 무릎 팔, 모두 창포와 같이 얼었다 그도 이 앞에서 뭔가를 비춰보는데 흔적없다 열나흘 달이 다니러 와도 냉랭히 모두 말이 없다 연못에 꿍꿍 발 굴러가며 어찌하면 나에게도 이렇게 누군가 들어와 서성이려나 "이쯤은 내가 있던 자리" "이쯤은 그 별이 오던 자리" 하며 보이는 사랑 /송재학 강물이 하구에서 잠시 머물듯 어떤 눈물은 내 그리움에 얹히는데 너의 눈물을 어디서 찾을까 정향나무와 이마 맞대면 너 웃는 데까지 피돌기가 뛸까 앞이 안 보이는 청맹과니처럼 너의 길은 내가 다시 걸어야 할 길..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담양에서 /손택수 아버지 뼈를 뿌린 강물이 어여 건너가라고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그 옛날 젊으나 젊은 당신의 등에 업혀 건너던 냇물입니다 댓글 8 joachim2019.12.02 19:58 신고 mein Freund Pit aus Neustadt ist gestern Abend sanft e..
하늘빛이 되는 /위선환 오직 아낌없이 버리기 위하여 나무들은 그리 많은 이파리를 매달았던 것인지 이 한나절의 잎 지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벌레들은 찬 바닥에 배를 대고 엎드려서 길게 기다리며 얼마나 숱한 울음을 참았던 것인지 사람들은 또 몇 해째나 잎에 묻힌 길 위에다 길을 내며 걸은 것이고 길이 다시 묻히는 가을 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 그루 조용한 나무 밑에 닿는 것인지 문득 쳐다본 머리 위 가지는 벌써 하늘에 젖어있다. 어쩔 것인가. 나무가 맨몸으로 서리 내린 공중에서 잎을 벗는 일이나 벌레들이 흙 속에 엎드리며 숨을 묻는 일이나 사람이 외지고 먼 길을 오래 걷고 야위는 일들이 다 하늘에 닿는 일인 것을 닿아서는 깊어지며 푸르러지며 마침내 하늘빛이 되는, 바로 그 일인 것을 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가을날 /위선환 놋대야를 꺼내왔다 한나절 닦았더니 하늘빛이 비치므로 찬물을 가득 담아서 뜰에다 내놓았다 비울것도 채울 것도 없다 ................... 미행 /문민수 한 사람이 웃었다 공원에 모여 있던 비둘기들도 따라 웃었다 한 사람이 음료수를 마시기 시작했다 꽃들이 간섭을 했다 한 사람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벌레들이 조마조마 지켜보았다 한 사람이 휙 돌아갔다 꽃들이 웅성웅성 떠들었다 벌레들이 한 사람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무심코 웃었다 ㅡ시인동네 2019, 9월호 ....................... 죽지 않는 시인들의 사회 /김이듬 그들은 둘러앉아 잡담을 했다 담배를 피울 때나 뒤통수를 긁을 때도 그들은 시적이었고 박수를 칠 때도 박자를 맞췄다 수상작에 대한 논..
개의 밤이 깊어지고 /강성은 개가 코를 곤다 울면서 잠꼬대를 한다 사람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개의 꿈속의 사람은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개가 되는 꿈을 꾸고 울면서 잠꼬대를 하는데 깨울 수가 없다 어떤 별에서 나는 곰팡이로 살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곰팡이로서 살아 있다는..
울리케 마당의 석가모니 부처 /오규원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을 다듬으며 쉬다가 돌아 앉아 부처의 한쪽 눈에 똥을 눠놓고 간다 새는 사라지고 부처는 웃는 눈에 붙은 똥을 말리고 있다 ―시집 '두두' 문학과지성사, 2008 품을 줄이게 /김춘수 뻔한 소리는 하지 말게 차라리 우물 숭늉을 달라고 하게 뭉개고 으깨고 짓이기는 그런 떡치는 짓거리는 이제 그만 두게 훌쩍 뛰어 넘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딱 떼게. 한여름 대낮의 산그늘..
구름이 지나가는 오후의 상상/최인숙웅크린 자세를 배웁니다어쩔 수 없는 마음을 자르고 말입니다맹수의 이빨이라도 순하게 길들일 준비 또한 되어 있습니다햇빛에 비틀거리던 거리를 그림 속에 가두고 싶습니까트렁크를 열면 소나기가 쏟아집니다의자에게 바게트 빵이라도 뜯어먹자고 제안해 봅시다잼이 묻은 칼은 베어 먹어도 좋습니다굴러가기 싫다면 흘러가십시오흘러가기 싫다면 원하는 방향으로대륙을 이동시킵시다등 뒤에서 새로운 버섯이 솟아납니다 숨겨둔 말/신용목 신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느라 여름의 더위를 다 써버렸다.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안개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아침이었다.비가 새는 지붕이 있다면, 물은 마모된 돌일지도 모른다.그 돌에게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하구에서 빗방울 하나를 주워..
나의 개종 /장석주 최근의 내 기분을 녹색이라고 한다면 내 종교는 물푸레나무다. 식물의 기분으로 맞는 아침들, 우리에게 개종을 끝내야할 의무가 있다. 눈꺼풀 없는 눈을 깜박이는 국립생태원의 내 착한 물푸레나무 형제여, 빙하와 수만 밤의 기억을 품고 안개 속에 서 있는 이타적인 내 이복형제여, 저 우듬지에 하얀 소금이 반짝이고 막 터지는 빛 속에서 파랗게 열리는 공중, 발끝으로 서 있는 저 물푸레나무들은 전생이 무용수였던가. 우리가 물푸레나무는 아니더라도 아침이라는 종교를 받아들이자. 개종자들이 아름다움 속에서 질식할 때 당신은 이미 개종을 예비하는 동물이다. ㅡ 시인동네 2019, 6월호 산, 그리고 인생 /이은숙 세상살이나 산山살이나 다를 게 없는데 세상살이만 힘들다 하네 등에 짊어진 무거운 배낭 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