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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02)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9월입니다 지난 8월 한달은 빠른 새가 비상하는 속도로 지나갔습니다, 마치 모르는 사이에 시간도둑이라도 다녀간 것처럼 말이지요. 숲과 들풀들도 바쁘게 성숙해져간 한달, 저는 시 한편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보냈습니다. 생각을 해보니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로써 지리하고 편편한 저의 나날들에 조금은 굴곡의 변화를 가져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9월에 어울리는 시들을 써주신 시인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도 편지 쓰기에 임합니다. 타지에서 쓰는 컴인지라, 남의 사진들로만 편지를 채운 게 좀 걸리긴 서 합니다만......... 행운의 9월을 빌어드립니다.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문 밖에서 아주 조그맣게 신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끔 숲사슴 가족들이 왔었지만 신발소리를 내진 않았었지요. 창 밖을 내려다 보니 3살짜리 옆집아이 라라였는데 언니가 학교에 입학한 뒤로 가끔씩 제 빈 마당을 한바퀴씩 뛰다가 가곤 한다고 아이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손에 한웅큼 들꽃을 꺾어 쥐고 왔어요. 부리나케 뛰어내려가서 라라왔구나, 하고 반기니 말 없이 몸을 옆으로 한번 비틀면서 꽃을 쑥 내밀었습니다. 아이의 맑은 눈빛을 보고 물었습니다, 사진을 한번 찍어도 되겠니 라고요. 카메라를 얼른 가져와서 찍는데, 이번엔 한사코 꽃을 얼굴로 갖다 댑니다. ....... ㅎㅎ 이번 일을 계기로 산골소녀 라라의 이야기를 자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달엔 여름꽃 소재의 시들을 골랐고요, ..
7월 초하루 시편지 젊었던 어느 날엔가 라벤더 벌판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그땐 디지털카메라가 없었고, 벌판 풍경 정도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생각을 했습니다. 나이가 지긋해지면 다시 와야겠다고요. 보랏빛 물결이 광활하게 펼쳐진 저 라벤더꽃밭을 지금 대한다면, 그때와는 감회가 다를 것입니다. 나이도 이미 지긋해졌고요, 무엇보다도 디지털카메라 손 쉬운 것 하나쯤도 이제 구비할 수 있고요. 그럼에도 떠나지 못합니다. 아니 떠나지 않는 대신 변명을 합니다. "지금 아니고 나중에 갈 거야"라고요. 그러게요, '나중에'가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책상 위에 꽂아둔 라벤더꽃 냄새를 맡다가 초하루 시편지를 쓰자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녀가신 반가운 닉들에..
6월 초하루 시편지 비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더니, 한차례 시원한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머잖아 뜨거운 계절이 올 것이라고 반짝 예고라도 하듯 말이지요. 때를 맞춰 6월이 열렸네요, 낮이 제일 길다는(밤이 제일 짧다는) 6월을 맞이하는 기쁨이 큽니다. 뜨거워지는 계절, 그래서 더욱 절실한 '비'에 관한 시 몇 편 골랐습니다. 행복하십시오. 비닐 우산 /정호승 오늘도 비를 맞으며 걷는 일보다 바람에 뒤집히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끝내는 바람에 뒤집히다 못해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비 오는 날마다 나는 하늘의 작은 가슴이므로 그대 가슴에 연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므로 오늘도 바람에 뒤집히는 일보다 빗길에 버려지는 일이 더 행복합니다 스페인의 비 /마종기 낡은 베레모를 쓰고 오징어 튀김에 싼 술을 ..
오월이 왜 오월(Mai)인지에 관한 설은 꽤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써 보면 어원이 되는 마이아(Maia)는 아틀라스 * 의 딸이자 새 생명의 잉태를 주관하는 여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짝을 짓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하지요. 꽃들은 어서어서 피어야 하고 벌과 나비들도 부지런히 쏘다녀야 하는 달이 오월이지 싶습니다. 시를 고르다 보니, 이 아름다운 오월에 유난히 슬픈 시들을 많이 생산되었다는 것은 확인하였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시편지에는 그러므로 비교적 덜 슬픈 시들만을 선별했고요, 작년 이맘때 다녀온 동독 친척마을 사진 몇 장도 끼웠습니다. 행복한 오월을 보내십시오. 초록색 비 -녹우단(綠雨壇) /이지엽 5월 녹우단(綠雨壇)에는 초록색 비가 ..
4월입니다. 제 아무리 빼어난 봄잎이라도 하늘이 배경이 되어줄 때 빛이 제대로 납니다. 시를 가까이 하는 일도 그와 같지 싶습니다. 봄잎으로 태어나 스스로 빛을 받거나 아니면 잎들의 탄생을 북돋아 주고 드높고 푸른 하늘배경이 되어주거나 말이지요. 늘 그래 왔듯이 4월에도, 시를 더욱 가까이 하고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버드나무의 한 종류, 가늘고 긴 가지가 늘어지게 자람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강해림 산 입구 천막식당에 중년의 남녀가 들어선다 가만 보니 둘 다 장님이다 남자는 찬 없이 국수만 후루룩 말아 먹곤 연거푸 소주잔을 비워대는데 여자는 찬그릇을 더듬어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젓가락을 든다 그릇과 그릇 사이 얼마나 많은 허방다리가 푹푹 발목 빠지고 무릎 깨지게 했을까 좌충우돌 난감함으로 달아올랐을 손..
3월의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여기는 요즈음 폭풍이 자주 이는데봄을 먼저 데려가려는 바람들끼리 세력을 다투는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합니다. 시 몇 편 골라보면서 3월을 앞당겨 느껴 보는데 나쁘지 않군요. 늘 건강하시고 행운의 3월을 맞으십시오. 봄의 직공들 /이재무 파업 끝낸 나무와 풀들 녹색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줄기와 가지 속 발동기 돌려 수액 퍼 올리랴 잎 틔우랴 초록 지피랴 꽃불 피우랴 여념이 없는 그들의 노동으로 푸르게 살찌는 산야 이상하게도 그들은 일할수록 얼굴빛 환해진다고 한다 ―시집『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실천문학사, 2014) 봄꽃의 주소 /반칠환 숨어 핀 외진 산골 얼레지 꽃대궁 하나 양지꽃 하나 냉이꽃 하나에도 나비가 찾아드는 건 봄꽃 앉은 바로 그 자리에도 번지수가 있기 때..
설 잘 쇠셨지요? 바빠서 주시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숲은 제 계절을 성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눈 아래 바짝 엎드린 풀들, 그 마른 이파리 어딘가에 숨죽인 곤충의 알들도 있겠고요. 다들 제자리에서 제보폭으로 살아주는 것들이 고맙습니다. 동봉할 사진을 고르다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아래 숲그늘의 눈은 어찌하여 저리 푸를까요? 건강하시고, 행복한 2월을 보내십시오 뒷산으로 난 흑림가도군요. 나무들이 눈옷을 벗었으니 봄을 기다려도 될 것 같군요 즐거운 편지 /황동규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
2017년이 열립니다. 해가 바뀌자 낭만시인 바이런*은 "다시 새해가 왔구나, 우편마차의 말을 바꿀 운명의 때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 마차도 마부도 우체국도 아닌, 마차를 이끌어 갈 말(馬)만 바꾼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마차이고 무엇이 말이었을까요? 희망의 새해, 복 많이 받으시오. 새해 첫 기적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여행에의 초대 /김승희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모르는 도시에 가서 모르는 강 앞에서 모르는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모르는 오리와 더불어 일광욕을 하는 것이 좋다 모르는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여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