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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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소녀 라라 사진과 8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7. 8. 1. 06:09

 

 

 

 

 

 

 

 

문 밖에서 아주 조그맣게 신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끔 숲사슴 가족들이 왔었지만 신발소리를 내진 않았었지요.

창 밖을 내려다 보니 3살짜리 옆집아이 라라였는데

언니가 학교에 입학한 뒤로 가끔씩 제 빈 마당을 한바퀴씩 뛰다가 가곤 한다고 아이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손에 한웅큼 들꽃을 꺾어 쥐고 왔어요.

부리나케 뛰어내려가서 라라왔구나, 하고 반기니 

말 없이 몸을 옆으로 한번 비틀면서 꽃을 쑥 내밀었습니다.

아이의 맑은 눈빛을 보고 물었습니다, 사진을 한번 찍어도 되겠니 라고요.

카메라를 얼른 가져와서 찍는데, 이번엔 한사코 꽃을 얼굴로 갖다 댑니다.

....... ㅎㅎ

 

이번 일을 계기로 산골소녀 라라의 이야기를 자주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달엔 여름꽃 소재의 시들을 골랐고요,

사진들은 이맘때 제 마당 풍경입니다.

 

행복한 8월을 맞으십시오.

 

 

  

 

 

 

 

 

 

 





치자빛 여름

/정용화

  

 

꽃이 피려는지 심장 근처가 가렵다

 

 

고여있던 시간이 몸 안에서 전구를 켠 듯 환해지면 그늘진 곳에서 철지나 피어있는 치자꽃의 하루를 빌려 당신에게 간다 잘 익은 구름으로 만든 싱싱한 어제를 두 손에 들고

 

 

집요한 질문들로 봄을 장악하고 나서야 꽃들은 물빛으로 흐른다 환한 손금의 한때에 작은 꽃문을 내고 툭치는 손길에 어깨를 내어주고 싶은 계절 제대로 여물지 못한 저녁을 미리 꺼내 종소리에 담가 그 속에 숨어 우리 꽃이나 잔뜩 피워볼까

 

 

나무들이 초록 입술을 뱉어낼 때 구름 한 모금 입에 물고 여름이 귓속으로 흘러든다 당신 얼굴에 박혀있는 열 개의 꽃들이 하얗게 젖고 있다 지금은 무르익은 언어로 방금 도착한 마음을 위로할 때

 

 

 

 

 

 

 

 

 

 

 

배롱나무 아래서

/임영조

 

 

어제 피운 바람꽃 진다
팔월염천 사르는 농염한 꽃불
밤 사이 시들시들 검불게 져도
또 다른 망울에 불을 지핀다
언제쯤 철이 들까? 내내
자잘한 웃음소리 간드러지는
늙은 배롱나무의 선홍빛 음순
날아든 꼴벌을 깊이 품고 뜨겁다
조금 사리 지나고 막달이 차도
좀처럼 下血이 멎지 않는 꽃이다
호시절을 배롱배롱 보낸 멀미로
팔다리 휘도록 늦바람난 꽃이여
생피같이 더운 네 웃음 보시한들
보릿고개 맨발로 넘다가 지친
내 몸이 받은 한끼 이밥만 하랴
해도, 오랜 기간을 견뎌온 나는
석달 열흘 피고 지는 현란한 修辭 
네 새빨간 거짓말도 다 믿고 싶다
그 쓰린 기억 뒤로 가을이 오고
퍼렇게 침묵하던 벼이삭은 패리라
처서 지나 한로쯤 찬이슬 맞고
햇곡도 다 익어 제 무게로 숙일 때
나는 또 한 소식을 기다려보리라
보름 넘어 굶다가 밥상을 받듯
받기 전에 배부른 배롱나무 아래서.

 

 

 

 

 

 

 

 

 

 

꽃들의 제사
/김승희


어떤 그리움이 저 달리아 같은 붉은 꽃물결을 피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혈관 속에 저 푸른 파도를 울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끊어진 손톱과 끊어진 손톱을 이어놓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cicada)에게 17년 동안의 지하 생활을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시카다에게 한여름 대낮의 절명가를 허하는가
어떤 그리움이 저 비행운과 비행운을 맺어주나
지금 파란 하늘을 보는 이 심장은 뛰고 있다
불타는 심장은 꽃들의 제사다
이 심장에는 지금 유황의 온천수 같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

 

 

 

 

 

 

  • 생강나무2017.08.02 14:10 신고

    왜요님!
    처음으로 놀러 왔다가 한참을 머뭅니다.
    옆집 소녀가 들고 온 꽃이 너무 이뻐요,^^
    8월 초하루 시 편지도 참 좋습니다.
    가끔 들러 쉬었다 가겠습니다
    여기선 숲지기님이라 부르는군요.^^

    답글
    • 숲지기2017.08.02 23:26

      반갑습니다.... 어머나.....ㅎ
      작고하신 평론가 김양헌선생님의 호가 아마 바람재였지 싶습니다.
      그분께서 '목요시학회'와 '바람재...'도 만들고 하셨지요.
      초고를 들고 가면 눈물이 쑥 빠질 만큼 혼을 내셨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참 그립습니다.

      그리고 라라를 이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녹색의 아주 깊고 순한 눈을 가진 아입니다.

    • 생강나무2017.08.03 09:16 신고

      바람재는 날마다 들락거리고 목요시학회도 은밀하게 드나듭니다.
      너무 고요하지만 그 고요도 또한 좋거든요. 김양헌 선생님 살아생전 뵙지는 못했어도 남기신 글들을 즐겨 읽곤 합니다.
      독일에 계시면서 가끔 댓글을 남기시는분이 왜요님이시군요.!!
      반가워요 진짜로..ㅎ

    • 숲지기2017.08.04 14:49

      ㅇㅓ쩐지 오랫동안 알아 온 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시학회엔 "장,엄,송(장옥관 엄원태 송재학)"님들을 비롯한 굵직한 분들이 계셔서
      여전히 그 위엄을...ㅎ
      자주는 못가지만 매년 송년 인사하러는 들리지요 .
      아마 가까운 미래에 시학회의 르네상스가 도래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 노루2017.08.03 02:28 신고

    들꽃 한 웅큼 손에 쥐고 온,
    그리고 사진 찍는다니 그걸 얼굴로 가져가는,
    저 소녀 라라, 참 귀엽네요.

    "치자빛 여름"도 그 느낌이 마치 누가 두 손으로
    잔뜩 들고 온 꽃을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소녀의 꽃다발과 달리, 어떤 꽃송이는 너무 정교해서
    조화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ㅎ

    답글
    • 숲지기2017.08.04 15:01

      라라는, 어쩜 이렇게 해맑은 아이가 있을까 싶은 흑림 산골아입니다.
      종일 풀꽃을 꺾거나 계곡에서 놀고요.

      꽃은, 흑림의 여름 어디에나 피는 아주 작고 예쁜 꽃입니다.
      모양은 도라지와 거의 같은데 훨씬 작은 꼬마꽃입니다.
      흑림마을 초대에 가 보면 식탁 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꽃이고요.
      꽃이름이?
      하하 까먹었습니다요.

  • 노루2017.08.04 04:56 신고

    "흘러가는 강물 위에 저 반짝이는 햇빛을 펄떡이게 하는"
    것들에 대해 따로 -- "어떤 그리움"은 떼어 놓고 -- 이것
    저것 떠올려 봅니다. ㅎ.

    답글
    • 숲지기2017.08.04 15:07

      싯구절과 함께 노루님께서 떠올리시는 것들에 대해
      한번쯤 글로 써주시리라 기대해 봅니다.
      지난 번의 글, 마음들이 그 어떤 세상적인 단절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서 교류한다고 하신 글은 생각할 때마다 여전히 가슴을 적십니다.
      고맙습니다.

  • 이쁜준서2017.08.13 08:08 신고

    숲지기님께 꽃을 나누고 싶어서 가까이 온 소녀,
    사진을 찍는다니 부끄러워서 저도 모르게 꽃으로 얼굴을 가리고,
    종일 자연에서 노느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꽃을 쥔 손가락마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맘으로 안아 줍니다. 순수해서 아름답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7.08.18 14:27

      그렇게 보셨군요, 안아주시는 꽃마음, 고맙습니다.
      준서만큼 마음이 예쁜 아입니다.
      아직도 혀짧은 말을 하는, 꼬마숙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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