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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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림에서 띄우는 5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7. 5. 1. 03:46

 

 

오월이 왜 오월(Mai)인지에 관한 설은 꽤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를 써 보면 어원이 되는 마이아(Maia)는 아틀라스 * 의 딸이자 

새 생명의 잉태를 주관하는 여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월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짝을 짓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하지요.

꽃들은 어서어서 피어야 하고 벌과 나비들도 부지런히 쏘다녀야 하는 달이 

오월이지 싶습니다. 

 

시를 고르다 보니, 이 아름다운 오월에 유난히 슬픈 시들을 많이 생산되었다는 것은 확인하였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시편지에는 그러므로 비교적 덜 슬픈 시들만을 선별했고요,

작년 이맘때 다녀온 동독 친척마을 사진 몇 장도 끼웠습니다. 

 

행복한 오월을 보내십시오.

 

 

 

 

 

 

 

 

초록색 비 -녹우단(綠雨壇)

/이지엽

 

 

5월 녹우단(綠雨壇)에는 초록색 비가 내린다 
녹우단에 내리는 비는 다섯 번은 울며 온다

 
하나는 시계풀과 참나무가 푸릇할 때 내리는 봄비
풀과 나무들 쭈뼛쭈뼛 울근울근 올라가는 소리 
둘은 녹우당 앞 은행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
500년 된 줄기에 자디잔 잎들 입 내미는 소리 
셋은 녹우당 뒤편 대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
가지마라 너 가고 나만 남아 구멍으로 운다 운다 
넷은 비자림(榧子林)에 스치는 옷 벗은 물결소리 
솨아솨아 미끈한 살결 연꽃 봉긋 벙글 듯 
다섯은 비 갠 뒤 바닷바람, 달 밀어올리는 소리 
지국총지국총 어사와 닫 드러라 닫 드러라

 
꽃양귀비 붉은 오월에 
싱그럽고 착한 비 오신다
한 번에도 다섯 번은 울며 오신다

 

 

 

 

 

 

 

 

오월의 눈

/구이람

 

 

바람 씽씽 부는 날

어지러운 눈발들이

새까만 눈동자들을 마구 흔든다

 

눈 둘 곳 없어

무심의 문을 들어 설 때

 

맨 앞줄에 앉아 나를 응시하는

풀꽃 여학생 하나

 

교수님!

오월에 왜 눈이 옵니까?

 

 

 

 

 

 

 

 

5월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이랑 (萬)이랑
이랑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버리련?

 

 

 

 

 

 

 

내가 세우는 나라

/이승주

 
 

을지로에서

모든 숨쉼들이 사라진 네거리, 환각의 불빛 네거리에서

저 달려가는 속력들을 멈추게 하고픈 사람들

저 오만하게 길을 막아 버티고 선 빌딩들을 밀어뜨리고 싶은 사람들은

내가 끊어준 차표를 들고 봄날의 기차를 타시오.

산비탈과 구릉의 온통 복숭밭 천지를 지나 나의 왕국에 이르면

성문 앞 백척의 꽃나무는 내가 심고

그대들은 꽃의 문을 밀고 들어오시오.

여기 내가 꿈꾸는 오월의 나라에서

이 나라 어진 백성들은 푸른 하늘 한 자락으로 마음을 삼고

가슴을 열어서 벌 나비떼를 날리는 꽃 봄날

어린 아이들이 비누방울 같은 웃음소리에 날개를 다는 일로 날이 저물어

맑은 거울로 가슴을 비추는 달밤

나의 소박한 바램으로 무정물(無情物)의 그림자조차 정겹게 숨쉬는 밤마다

정전(正殿) 기둥에 꽃등이 걸리고

나를 송축하는 풍악소리 횃불처럼 피어나리니

가슴에 쨍 하고 금이 간 사람들아,

사랑한 죄로 사형 말고 무기(無期)를 받은 사람들아.

그대들의 징한 바램이 그대들의 가슴에서 이루어

지나니

그때 나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로다.

나는 누구의 아버지로다.

 

 


―시집『내가 세우는 나라』(고요 아침, 2006)

 

 

 

 

사진들은 모두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찍은 것입니다. 제 친척들이 사는, 구 동독 어느 평화롭고 조그만 마을이지요. 

 

 

 

 

 

* 아틀라스(Atlas)-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즉 티탄족으로 하늘 세계를 혼란스럽게 한 죄로 윗몸으로 지구를 떠받는 형벌을 받은 

 

 

 

 

 
  • 노루2017.05.03 17:05 신고

    김영랑의 "오월"이 저는 좋으네요.
    어렸을 적 피난 가서 살던 부산 천마산 기슭의
    보리밭, 그리고 올려다 보던 산도 생각이 나고요.
    ("수놈이라 쫓을 뿐"에 오타가.)

    동독 마을 사진도 유심히 자꾸 보게 되네요.

    답글
    • 숲지기2017.05.03 21:54

      노루님 참 어리셨을텐데, 피난시절 보리밭 풍경까지 기억하시다니요.
      제가 나고 자랐던 시골마을, 제 방 문을 열면, 보리밭 이랑이 쭉쭉 이어졌습니다.풀냄새 가득했던 오월의 아침 햇살에 이슬방울들이 빛났었지요.
      .
      오자 지적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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