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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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깃털처럼 가벼운 시작

숲 지기 2018. 4. 1. 00:11

 

 

 

 

 

 

4월엔 만만한 게 '꽃'입니다.

산책을 하다가 무심코 발 밑을 보면, 그 아래 풀꽃 여러 송이가 누웠다가 일어납니다.

특히 4월엔 그들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지요.

눈 돌리는 곳 어디에나 피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예요,

자세히 보면 웃고만 있던 그 꽃들도

일정 시기가 되면 그 만큼 집니다.

저는 이것을 '물리적인 이별'이라고 이름하였어요.

보기에는 헤어지는 듯 하지만 사실은 가짜로 떠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늦어도 떨어진 꽃잎이 흙이 될 때면 그들은 다시 만나니까요.

꽃을 떠나 보내는 나무는 그래서 슬퍼하는 법이 없지 싶습니다,

고목일 경우는 더 무덤덤하지요.

 

지금은 이 곳의 주요 명절인 부활주간입니다.

종교와는 별개로 얼마간 수도자들의 일상을 모방하여 보았습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몸과 생각 속에서 정돈하고 청소를 하였지요.

그 덕분인지 꽃 피어날 4월이 더 반갑습니다.

 

만우절로부터 시작하기에 더 만만한 4월,

깃털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맞으시길.......

 

 


 

 

 

 

 

 

 

 

 


산중문답

/이기철

 

산중에는 작위(爵位)보다
엽록이 앞선다
고인 물이 하류로 흐르지 않지만
광목필 같은 물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삼백 년 세월은 이 산의 깃을 흔들며 지나갔지만
기슭의 명아주 잎새 하나도 바꿔놓지 않았다


사천 지나 쌍계 마현
섬진강은 비단 필(匹)로
들 가운데 누워 있다

종일 일없는 너도밤나무를 쳐다보며
문턱에 걸터앉아 계곡물 붇는 것만 구경한다
물살은 서로 싸워도 둑을 넘지 않고
산봉은 손 헤지 않아도 해와 달을 제 등뒤로 넘겨 보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자(修者)가 되는 길만이

유리의 길은 아니다


연꽃 위에 놓인 법구경 한 구절도
누가 공으로 내 마음의 쟁반에 갖다놓겠는가
서릿바람 속에 뼈로 설 수 있어야
마음의 유리를 찾을 수 있다


산은 언제나 나보다 높은 데 있고
물은 언제나 나무보다 낮은 데로 흘러간다

 

-시집『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사, 1988

 


 

 

 

 

 

 

일륜월륜(日輪月輪) ㅡ 전혁림의 그림에 부쳐
/문태준

아름다운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보았네
내 고운 님의 맑은 눈 같았지
님의 가늘은 손가락에 끼워준 꽃반지 같았지
대지에서 부르던 어머니의 노래 같았지
아름다운 바퀴가 영원히 굴러가는 것을 보았네
꽃, 돌, 물, 산은 아름다운 바퀴라네
이 마음은 아름다운 바퀴라네
해와 달은 내 님의 하늘을 굴러가네

ㅡ『시인동네』(2018, 2월호)

 

 

 

 

 


 

 

 

 

 

꽃은 부드럽지 않다

/이수익 

  꽃은 네가 말하듯, 그렇게 아름다운 추상이

아니다.

 

꽃은 지금

절박한 실존으로

제 생의 위태로운 극단 위를

피고 있다.

 

꽃이란 꽃 저마다 다른 꽃을 딛고

우우우, 봉우리를 높이 일으켜 세우고 있는

치열한 경연장과도 같은,

꽃들의 광장으로 가서 보라.

 

층층이 만발한 그들은

저 하나 우뚝 피어나기 위해 옆옆의 꽃을

밀치고 누르거나

혹은 짓밟으며

불꽃 튀는 관능의 빛깔과 향기와 자태를

하늘 가운데 눈물겹게 드러내려 하고 있다.

 

, 실은

꽃들은

저리도 제 피를 말리면서

시들고 있다.

?

시집꽃나무 아래의 키스(천년의시작, 2007)

 


 

 

 

 

 


詩가 멍이다

/최길하

 

시 몇 줄 써서 속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어느 날 옷과 가슴에 푸른 멍이 베었다.
말 못할 은유가 있었는지
달무리 같은 푸른 멍이 들었다.
자음도 모음도 다 뭉개져
둥근 달무리가 되었다.
꽃 한 송이가 커다랗게 증발하고 있다.

 

[시작노트] 문장이 생각나면 메모를 해 둔다.
밖에서도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를 해서 주머니
에 넣는다. 여름에 땀이 나면 잉크가 퍼져 옷
에도 가슴살에도 푸른 멍이 들었다. 문장도 글
씨도 뭉개져 푸른 멍이 되었다.

 

ㅡ『세상은 빛 소리 파동의 변상도 분자들의 춤이다』(유진출판사, 2017)

 

 

 

  • shinilc2018.04.01 21:45 신고

    안녕하세요~~
    시간이 벌써 4월이군요..
    이젠 어딜 보나 꽃으로 물든 산천을 보게 됩니다..
    우린 눈으로 즐기기만 하지만,
    한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소쩍새는 울었나? ㅎ
    꽃은 나름대로 살아내기위해 생존의 발버둥을 친다는 내용은
    꽃의 입장을 생각치 못한 사람들의 이기적인 관점이었네요..ㅎ
    4월 중후반이 되면 꽃은지고 푸르른 새싹들이 연푸른 산천으로
    만들겠네요..
    4월에도 봄처럼 행복한 삶이 되세요~~^^

    답글
    • 숲지기2018.04.02 15:45

      오랫만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올핸 봄 오기를 참 많이 기다렸습니다.
      자전거 타시기에도 이 봄이 좋으시겠지요?

      여긴 이제 막 꽃망울이 터지고 있습니다.
      봄이 길어서 몇 달간 봄기운에 푹 빠져 지낼 거예요.
      생각만 하여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쁨의 부활절을 보내십시오...

  • 추풍령2018.04.02 22:29 신고

    조용한 숲속 에 꽃망울이 여밀고 한잎 두잎 꽃이 피기 시작하는군요. 무슨 사연이 있어
    산업 문명국 도이체에 가셔서 하필이면 그런 숲속에 살게 되셨는지요?
    적막과 고요, 힐링하시고 수도하시기에는 좋으시겠읍니다. 최근 한국 문단에 발표되는 시들도 모두 탐독하고 계시는군요. 머지 않아 주독일 한인 헤르만 헷세나 하이네가 탄생하려나 기대해 봅니다.

    답글
    • 숲지기2018.04.04 14:10

      우리 시 읽기에 참 열악한 상황일 수도 있지만, 제가 선택한 것이니 불만은 없습니다. 국제정치사를 집필하시는 추풍령님의 스케일에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헤세의 고향 마을이 가깝지요.
      깊이 감사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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