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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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8. 5. 1. 00:11

피천득님은 오월을

"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 하였습니다.

스물 한살이면 이제 막 물이 오른 청년이지요.

그 청년이 찬물로 금방 세수까지 하였는데 상상이 가십니까?

 

가물가물하거나 또는 그때의 얼굴이 쉽게 떠오르지 않으면

눈을 가늘게 뜨고 지금 바로 창밖을, 먼들 먼숲을 바라보십시오.

스물한살 청년처럼 만물이 지금 세수를 하고 있지요?

 

오월에도 행복하세요.

 

 

 

 

 

 


천둥 같은 꽃잎
/송재학 

절마당의 산벚나무를 보러왔는데 이미 산벚나무 죄다 진
회두리판, 다만 법당에 매달린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연등 불빛이
꽃살문 틈새로 화살처럼 쏟아져나와 산벚나무 온전히
감싸니, 그 나무 뜻밖에 또 한 번 꽃 피우느라 분신焚身을
준비하는데 어찌해 천둥소리는 남보다 내 안에서 먼저
북채를 잡았을까 

          

 

 

 

 

 

꽃들
박영근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녹슨 철조망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트리다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흐르는 바람에 햇살 속에
어둠에마저 빛나는, 내가 아직도 통과하지 못한
어떤 오월의 고통의
맨얼굴

 

 

 

 



오월

/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득료애정통고 - 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失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 -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꽃의 고전을 읽다
ㅡ 청송 '꽃돌박물관'에서
이정원

꽃핀 채 호박화석이 된 스트리크노스 엘렉트리도 아니고
빙하기 다람쥐가 감춘 실레네 스테노필라도 아니고
돌꽃이 피었다
꽃이 영겁을, 돌이 영혼을 꿈꿀 때
꽃의 시간과 돌의 시간이 뒤엉겨
쉬이 찢길까봐
금세 시들까봐
꽃들이 돌 틈 엿보는 동안
서로의 몸속에 스미도록 사무치는 마그마의 저녁
돌은 단단한 심장 헐어 꽃잎을 심었다
깍지 낀 인고의 날 지나
늦봄에도 흐드러진 매화
가을을 앞당겨 핀 국화들
모란은 담담히 웃고 장미는 가시도 없이 도도한데
꽃의 영혼이 오랜 적막을 건너와 말을 건다
받아 적는 꽃의 말.
나를 깨우지 마세요

ㅡ『한국 동서문학』(2018, 봄호)

 


 

  

(사진들은,

일전 친구네집 초대에 가는 길에 트인 밀밭을 만났습니다.

예외적으로 지인이 운전하는 차에 동승하던 중 찍었고요)

댓글 17

  • eunbee2018.04.30 19:58 신고

    아, 5월이 오는군요.
    해마다 그리도 환희롭던 계절이.
    올해엔 또 얼마나 빛나려는지요.

    시를 읽으니
    가슴이 떨리네요.
    정녕 아름다운 시입니다.

    5월도
    고맙고
    아름다울
    숲지기님을 생각하니
    내가 스물한 살로 돌아가고야
    말것같습니다. 설레는 예감...

    답글
    • 숲지기2018.04.30 21:10

      이 시대에 생산되는 시를 읽기 위한 수단으로 매월 올리는데,
      이웃의 은비님,
      함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5월이어서 더 좋고요.

      이 5월에는 71세 괴테가 19살 어린 처녀에게 청혼을 하던,
      그런 초자연적인 힘이 쑥쑥 솟았으면 합니다.
      하하 그 정도의 기상천외한 일은 드물겠지요만..ㅎ

    • 추풍령2018.05.02 03:21 신고

      71세의 괴테가 19세의 소녀에게 청혼을 하였군요.
      그러길레 괴테(怪態)라고 이름지었겠지요.

    • 숲지기2018.05.02 14:00

      네, 청혼을 해서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여인의 집안에서 강하게 반대를 했지요,
      당시 괴테는 재상으로서 문학인으로서 슈퍼스타였는데도 말이지요.

  • 아침향기2018.05.01 07:25 신고

    오월의시들...
    스물한살청년이 방금 세수한듯한 그런 신록의계절입니다
    늘 푸르름을 잃지않고 청년같이 사십시요~

    답글
    • 숲지기2018.05.02 14:02

      해맑으신 아침향기님께서도
      행복한 오월을 사시기를.

  •  
      •  
  • shinilc2018.05.01 14:38 신고

    덕분에 좋은 시를 보고 가네요~~
    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저는 오월이 제일 좋아요..
    4월은 좀 잔인하고..
    6월은 좀 더워지는 시작이고..
    5월은 어중간해서 좋습니다..ㅎ
    5월만 있으면 좋겠네요..ㅎ
    사진이 참 유럽스러워요..
    우리나라에서는 볼수없는..ㅎ
    좋은 5월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답글
    • 숲지기2018.05.02 16:26

      오월이 왜 좋으신지 알아맞춰 볼까요?
      하하 신일님 자전거타기 좋으시니...ㅎ

      신일님께 오월 같은 나날만 있기를 빌어드립니다.

    • shinilc2018.05.03 00:13 신고

      생각해 보진 않았었는데...
      그러고 보니,,
      오월에 자전거 타는 재미가 있었다는것을
      다시 알게 되었네요..ㅎㅎ

  • 노루2018.05.01 15:34 신고

    오월엔 마음이 자주자주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
    되어서 좋아요.

    밀밭 풍경도 참 좋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8.05.02 16:30

      지금의 밀밭은 그냥 짙은 녹색입니다. 아직 이삭이 올라오지도 않아서죠.
      좀 있으면 밀꽃이 피고 밀이 익으며 점점 황금색 들판이 되겠지요.

      행운의 오월을 보내십시오.

  • 추풍령2018.05.02 03:12 신고

    KBS오락 프로 "가요무대"에서 '이달의 신청곡'을 들으며 흘러간 옛 노래를 즐기다가
    숲지기님이 매달 올리시는 "초하루 시 편지"에서 피천득씨의 주옥같은 순정시를
    덕택에 읽게 됩니다. 미세먼지 황사로 매마른 속세에 살다가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 한살의 청년같은 싱그러움이 다가 오는가 하면 "유월이 오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 대목에선 공기 맑은 숲속에 사시는 숲지기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답글
    • 숲지기2018.05.02 16:36

      아, 가요무대....... 옛노래를 들을 수 있는.....
      저도 숲을 질러서 운전할 때 트로트노래를 흥얼거립니다.
      끝까지 아는 게 없어서 이것저것 아무거나..ㅎ

      느낌에 추풍령님께서도 숲 가까이 사실 듯 합니다.
      아니신가요?
      남들은 따분하다지만 저는 감사히 숲과 함께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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