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7월 초하루 시편지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7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8. 7. 1. 07:17

 

 

꽃 주위를 맴돌던 벌이 어떻게 꽃의 영역에 발을 내딛으며,

연인인 벌을 맞아서 나직이 떨던 꽃들은 또 얼마만에 꽃잎을 오므리는지를 보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나절에 일어납니다.

 

7월은 꽃에게도 벌에게도 놓쳐서는 안 될 한때이지요.

시들을 빌어 오면서 쓰신 분들께 존경과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올해 마당의 보레취꽃들과 그들의 연인 벌 한마리  

 

 

 

 

 

깻잎 반찬

 /김순진

 

깻잎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실에 꿴 깻잎뭉치처럼 뭉쳐 살고 싶다

서로 떨어져 국수 수제비를 먹고 살다가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따끈한 쌀밥 한 술 산다고 우기며

깻잎을 얹어주고 싶은 사람

아래 있는 깻잎 꼭지를 젓가락으로 잡아주고 싶은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깻잎장아찌가 서로 붙어 잘 일어나지 않을 때

밑장을 지그시 눌러주거나

먹고 사는 일을 거들어주고 싶은 사람과

이웃하며 살고 싶다

 

ㅡ시집<복어 화석>

 

 

 

 

 

 

 

 

그것은 거의 연극

/이성복

 

 

 

그것은 거의 연극,
아버지 놀이에도 지친 아이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꿉놀이
막이 내려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해가 지고 해가 뜨는 것도 연극
오이꽃이 웃는 것도 연극

고통은 밤하늘에 떠올라 울창한 숲을 이루고
그 아래 또 熱氣(열기) 나는 풀잎 엉클어져
숨소리 거친 골짜기,
꽃 핀 나무들의 괴로움

그것은 거의 연극,
막이 내려도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

 

 

 

 

 

 

 


 

 

 

 

 

 

수평선
/문태준

내 가슴은 파도 아래에 잠겨 있고
내 눈은 파도 위에 당신을 바라보고 있고
당신과 마주 앉은 이 긴 테이블
이처럼 큼직하고 깊고 출렁이는 바다의 내부, 바다의 만 리
우리는 서로를 건너편 끝에 앉혀 놓고 테이블 위에 많은 것을 올려놓지
주름 잡힌 푸른 치마와 흰 셔츠, 지구본, 항로와 갈매기, 물보라, 차가운 걱정과 부풀려진 돛, 외로운 저녁별을

ㅡ<발견> 2018, 여름호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최백규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

 

꽃가지 꺾어 창백한 입술에 수분하면 교실을 뒤덮는 꽃

꺼지라며 뺨 때리고 미안하다며 멀리 계절을 던질 때

외로운 날씨 위로 떨어져 지금껏 펑펑 우는 나무들

천천히 지구가 돌고 오늘은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단 한 번 사랑한 적 있지만 다시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너의 종교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몇

평의 바닷가와 마지막 축제를 되감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에게 거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누군가 학교에 불이 났다고 외칠 땐 벤치에 앉아 손을 잡고 있었다

운명이 정말 예뻐서 서로의 벚꽃을 떨어뜨린다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계간 <시산맥> 2015년 가을호

 

 

 

 

 

 

  • 이쁜준서2018.07.03 01:25 신고

    마지막 사진의 꽃에는 벌이 보이지 않습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 벌도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갔고, 꽃들도 저러다 밤이 오고
    그런가요?

    필사를 하신다 것을 알고서 숲지기님께서 올리신 시를 몇번을 읽습니다.
    매달 새 시를 올려 주시고, 그 시를 관심 깊게 읽게 되고, 감사드립니다.

    답글
    • 숲지기2018.07.04 16:31

      세상에 시가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다른 메카니즘에서도 그렇듯,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 시를
      수용하고 각자의 정서에 기름칠 하는 것은 선택입니다.

      이쁜준서님 함께 해주셔서 기쁩니다.

      사진을 일부러
      벌이 꽃 주위를 맴도는 것에서
      마지막 떠나 버린 것으로 나열하였습니다.
      벌의 한때나 꽃의 일생에
      사람의 일도 대입해 보고싶었던 사진입니다.

    • 숲지기2018.07.04 16:31

      제가 필사하는 사정까지 헤아려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파란편지2018.07.15 03:03 신고

    네 편을 다 이야기하는 건 건방지겠지요?
    숲지기님 마음, 시를 보시는 시간들도 헤아려보면서 저더러 고르라면 김순진 시인의 "깻잎 반찬"입니다.
    어쭙잖은 저도 그런 사람을 많이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 호사를 누리며 여기까지 와서는 쓸쓸히 앉아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렇게 해준 마음으로 행복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8.07.15 11:01

      저도 저 시를 읽으며 깻잎 꼭지를 지그시 누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이론으로 일단 무장을 해 둬야 실전에서 될까 말까 하니까요 ㅎㅎ

      감히 말씀드리지만,
      교장선생님의 쓸쓸하다 하심이 왜 저는 이해가 안 갈까요?
      수 많은 제자와 그 풍부한 일선 교육 경험에,
      사람 좋으시고, 문장력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고요.

    • 파란편지2018.07.15 15:37 신고

      글쎄요. 아마도 지금 저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본질이 쓸모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 숲지기2018.07.15 16:22

      끊임없이 사색하고 자기 정화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는 교장선생님,
      순도 99쩜9프로세요.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9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9.01
8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8.01
6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6.01
5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5.01
4월, 깃털처럼 가벼운 시작  (0) 2018.04.0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