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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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8. 8. 1. 00:11

 

반쯤 깨진 연탄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 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한지 손을 뻗어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 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너를 본 순간
/이승훈

너를 본 순간
물고기가 뛰고
장미가 피고
너를 본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를 본 순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갑자기 걸레였고
갑자기 하아얀 대낮이었다
너를 본 순간
나는 술을 마셨고
나는 깊은 밤에 토했다
뼈저린 외로움 같은 것
너를 본 순간
나를 찾아온 건
하아얀 피
쏟아지는 태양
어려운 아름다움
아무도 밟지 않은
고요한 공기
피로의 물거품을 뚫고
솟아오르던
빛으로 가득한 빵
너를 본 순간
나는 거대한
녹색의 방에 뒹굴고
태양의 가시에 찔리고
침묵의 혀에 싸였다
너를 본 순간
허나 너는 이미
거기 없었다


ㅡ강현국엮음<우리시대 마지막 사랑의 시 프랑스영화>







공구통을 뒤지다가
/박상순

아홉 살의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공구통을 뒤집니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튼튼한 놈들만 긁어모았습니다
당신께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열한 살이 됩니다
열 살 때의 일들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께 보냅니다
즐거운 편지처럼
내년엔 나도 통통한 애인과 함께
오동도나 제주도
아니면 카프리 섬의 소형 버스 안에서
삼십대를 보냅니다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뾰족한 놈들만 당신께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내년엔 나도 여덟 살이 됩니다
여덟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못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뒤
다시 아홉 살이 되면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내게 남겨진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ㅡ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민음사, 2017


#.........................................






요 며칠 동안의 일입니다.

똑 같은 복장 즉, 검은 민소매원피스에 청초록 리본의 모자 차림을 했었지요.

음악회와 어르신 행사, 또 장례식까지 그렇게 갔습니다.

단벌신사냐구요? 뭐 그런 셈이 되었네요.

이 한여름에 딱히 격을 차릴 장소들이라서 말입니다.

옷차림도 그랬지만, 단편적으로 보면

음악회와 장례식의 차이가 좁혀지는 게 요즘의 추세인 것 같습니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지인을 묻던 날은

'기꺼이(이왕이면) 보내자'는 의지로 일부러 행진곡 풍의 4박자 노래들이 연주되었더랬습니다.

떠나는 지인도 이에 걸맞게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지요.

'한 사람이 길을 떠나는 것은 설레임 가득한 여행을 앞 둔 것이다.

또한 우리 앞에 누군가가 뒷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내 앞에 다가올 것을 예감하는 일이다.'

무릎을 꿇은 제장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습니다.

"땅의 어머니여, 당신의 아름다운 딸을 받아주세요."

 

행사가 있던 카펠레 주변은 여름숲이 우거졌고 들꽃무리들이 빙 둘러 피었었지요.

떠나는 지인과의 추억담들을 들을 때는

우리도 마치 한포기 들꽃무리들처럼 서 있었지 싶습니다.

 

이윽고 유족에게도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을 때,

지인의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께 인생시(헤세의 <계단>)를 드렸습니다.

나직하게 고맙다며 포옹을 하는데,

그녀의 등언저리가 더위에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예외가 아니었고요.

아, 이렇게 우린 살아 있지.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하였습니다.

 

.

성숙한 여름,

8월을 맞으세요.

 

(8월부터 블로그 여름잠 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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