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9월 초하루 시편지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9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18. 9. 1. 00:11

Image result for reise

 

무인도
/이영광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도에 가고 싶다
가서, 모든 기정사실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만기 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Related image

 

발의 본분

/조경희
발은 걸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를 느꼈다

발바닥이 지면과 맞닿아

땅을 딛고 서 있을 때

발은 발다웠다

걸어야 한다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깁스에 결박당해 있던 지난 며칠 동안

발은 발이라기보다 한낱 석고에 지나지 않았다

걷는 일이야말로 발의 본분이며 진보이고

또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깁스를 풀고 오른쪽 발을 바닥에 내딛는 순간

묵직한 지면이 발바닥을 자극하며

발에 힘이 실렸다

중력을 받들어

꾸욱, 바닥에 바닥을 포갰을 때

지구를 들어 올리는 힘의 중심이 되었다 발은,

멈췄던 길을 다시 부른다

눈앞에 지도가 펼쳐지듯 걸어서 가야 할 길들이 어서 오라 그의 발을 끌어당긴다

왼발, 오른발,

발은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지만

아무리 가보고 싶어도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는 것도

발바닥에 지문처럼 새겨두었다

새들이 먼 하늘을 날 때 희열을 느끼듯

발은 먼 길을 여행하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때 걸음이 가벼웠다

 

   격월간<시사사> 20175-6월호

 

 

 

 

 

밤의 숙박계

/윤성택

  

가방을 비우자 여행이 투명해졌다

기약하지 않지만 이별에는 소읍이 있다

 
퇴색하고 칠이 벗겨진 간판은 한때

누군가의 빛나는 계절이었으므로 내일은

오늘 밖에 없다 친구여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여인숙에서 기침을

쏟고 싸늘히 죽어가는 꿈을 꾸기 때문이네

 
수첩이 필체를 혹독히 가둘 때

말의 오지에서 조용히 순교하는 글자들,

나는 망루에 올라 심장의 박동으로 타오르는

소각장을 본다네

 
신발을 돌려놓으면 퇴실이요

이곳 숫자는 주홍 글씨라네

 

이불을 쥐는 손으로 만지는

전구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호실을 밝힌다

 

아름답다, 라고 슬프게 발음해 보는 날들이

좀체 돌아오지 않아도, 빈 집은 제 스스로

별을 투숙시키고 싶다

 
적막은 밤의 숙박계,

치열이 고른 지퍼에 밤기차가 지나면

어느 역에서 가방이 나를 두고 내린다

 

-<미네르바> (2013. 가을)

 

Image result for jakobsweg

 

여행자 나무

/김명인

 

이 나무는 사막을 거쳐 온 여행자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자리

그늘을 깔아놓고 행려의 땀방울을 식혀준다

헤아릴 수 없는 순례의 길목이 되면서

뻗은 실가지도 어느새 우람한 팔뚝으로 차올랐지만

나무는, 여행자들이 내려놓는

들뜬 마음이나 고단한 한숨 소리로

사막 저쪽이 바람의 편인 듯 익숙해졌다

동이 트고 땅거미 져도 활짝 열린 사막의 창문

맞아들이고 떠나보낸 여행의 수만큼 나무는

세계의 전설로 그득해졌지만

잎을 틔워 초록을 펴고 시드는 잎차례로

낙엽까지 가보는 것이 유일한 해살이였다 

언제나처럼 굴곡 겹친 사막의 날머리로

지친 듯 쓰러질 듯 한 사람이 멀리서 왔다

딱 하루만 폈다 지는 꽃의 넋과 만나려고

선연하게 둘러앉는 두레의 그늘,석양이 지고 있다

창 박ㄲ으로 보면 오늘의 여행자는 홀로 서서 고즈넉하고

나무 또한 그가 버리고 갈 길에는 무심하지만

펼쳐든 여정이라면 누구라도

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행이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제가 포개놓은 그늘에 서게하는 걸까?

아직 행려의 계절이 끝나지 않았다

어디로도 실어 보내지 못한 신생의 그리움 품고 나무의

늙은 가지에 앉아

몸통 뿐인 새가 울고 있다

 

-시집 <여행자 나무> 문학과 지성 2013

Image result for reise

 

여행

/정호승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 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Image result for reise

 

 

이쯤이면 눈치를 채셨겠네요.

9월 초하루 시편지의 주제이자 소재는 

네, '여행'입니다.

한때는 '낯 설어 보기'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여행을 부추긴 적이 있지요.

이 말은 곧 '익숙함으로부터 멀어지기'와 동전의 앞뒷면 같다고 하겠습니다.

 

요즘 부쩍 이런 지인들을 더러 봅니다.

오늘,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다는 말을 애창곡처럼 되풀이하는 분들요.

그만큼 그가 가진 꿈이 절실하다고 이해를 합니다.

언제가 되었든 떠나시걸랑,

튼튼한 신발과 녹슬지 않은 호기심과 약간의 용기를 여행 짐에 장전하시는 걸 잊지 마시고요.

 

아 그리고, 익숙함을 고수하시는 분들은

마음이라도 떠나보아요 위의 여행 시들 음미하면서.

 

여행하기 좋은 9월,

건강하시고요.

 

  • 이쁜준서2018.08.31 22:35 신고

    시들이 살아가면서 어떤 때때로 느끼는 맘과 생각이 담겨져 있습니다.
    해면에 물이 적셔 지듯이 시를 읽으면서 자잘한 물결 같은 감동이 일렁입니다.
    감사 드립니다.

    발의 깁스는 다치셨던 모양입니다.
    나아 지셨다니 다행 입니다.

    그렇지요.
    발은 바닥에 닿아서 힘이 실릴 때가 건강한 것이지요.

    좋은 시 읽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답글
    • 숲지기2018.08.31 23:59

      시를 읽는 삶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풍요롭지 싶습니다.
      좀 더 많이 읽고싶어서 초하루마다 올리는데,
      어떤 땐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합니다.
      함부로 남의 시들을 갖다 쓰니 말입니다.

      공감해 주시는 이쁜준서님 고맙습니다.
      발의 깁스는 ㅎㅎ 잘 모르겠습니다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는 건강합니다.
      이쁜준서님도 건강한 하루 보내셔요.

  • 사슴시녀2018.09.03 05:37 신고

    발을 다치셨나요 숲지기님?
    농부 발자욱 기다리는 아가들이 많아서 발을 다치시면 안되는데..
    많이 아프시지 않고 빨리 완쾌 되시길 바래요!

    정호승 시인의 시는 한국 지하철 문에서도 몇번 본듯해요,
    아무생각 없이 지하철 문열리기만 기다리다
    시를 발견하면 내조국 한국은 참 이래서 좋다!
    정서가 말라버린 저같은 사람에게
    시를 읽고 감상할 기회가 주어지니까요!
    숲지기님도 많이 고마우세요, 무뎌진 제 감성을 가끔 술렁이게 해주시거든요!

    은퇴하고 나서 이유없이 떠나고 싶어서 그감정을 짖누르지 못해서
    멀쩡한 예쁜집을 팔아버리고 이사를
    대륙끝에서 끝으로 와버리곤 제가 저지른일에 대해서
    대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고 있답니다.
    꼭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었는데 말이죠.
    후회하는걸 지독히 싫어해서 그냥 묵묵히 한걸음씩 앞으로 가고 있습니다만...
    아무도 저를 이해못함을 저 자신도 긍정 하면서 말이죠.
    녹슬지 않은 제 겉잡을수 없는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답글
    • 숲지기2018.09.03 21:29

      아닙니다 다치지 않았는데, 아마 윗분께서 뭔가 오독을 하셨지 싶습니다.
      그래도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나라 지하철을 안 가본지 10년 넘었으니,
      제가 알 턱이 없습니다요.
      이토록 알려진 시인 줄 몰랐습니다.

      지독히도 싫어하신다는 그 단어, 저도 싫어합니다..
      그래도 가끔은 서랍 앞에서 열어볼까 고민을 하지요.
      열지 않습니다, 어차피 과거는 굳게 닫아버렸으니까요.
      그 누구도 아닌 제 스스로 그리 하였지요.
      못난 저의 이야기로 빗대어 썼습니다.

      지금이 가장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아직은 가시적인 게 없어서 불안하시고요.
      하지만 님이 부러운 사람들 많을 겁니다.
      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 속속들이 감춘 진짜 진심을 물어 보세요.
      할 수만 있다면 님처럼 용기를 내고싶은 분들 많을 거예요.

    • 사슴시녀2018.09.04 01:05 신고

      숲지기님 돗자리 까셔야 할것 같아요! ㅎㅎ
      어려선 일저지르고 뒤도 안보고 앞만보고 갔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감이 떨어지는건지
      귀가 얇아지는 건지..
      무모한 제 고집으로 저와 한배를 탄 남편을 힘들게 하는것 같다는 생각?...그점이 힘들어요.
      남편이지만... 저땜에 누가 힘든건 싫거든요!
      자기생각을 잘 들어내지 않는 남편이라서 그런것 같아요. 자꾸 물어보기도 그렇구요.
      그러고보니 부부싸움 이유 3가지를 다 짊어지고 있네요! ㅎㅎ.
      너무도 솔직하시고 인간미 나는 조언
      그리고 저를 이해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비밀댓글]

    • 숲지기2018.09.04 13:29

      썼다가 댓글 일부를 지웠습니다.
      진짜로 돗자리를 깔게 될까봐서요 ㅎㅎ
      암튼 여러모로 힘든 시기를 견디는 중이시니,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실 줄 압니다.

      그런 거 알고 시작하셨을테고요,
      집이 완성되면 이 또한 추억일 겁니다.
      혼자도 아니시니 함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서" 수처작주 하십시오.

  • 노루2018.09.05 08:06 신고

    '여행'이라니, 아마 60년대 말이거나 70년대 초에,
    교과서 아닌 어떤 책에서 우연히 읽고 좋아하게 된
    첫(?) 영시, 그래서 지금도, 저녁 무렵 '철썩'이는
    바닷가를 잰 걸음으로 걸어가는 나그네의 이미지로
    기억에 남은 그 시가 생각나길래 찾아보았습니다.


    The Tide Rises, the Tide Falls

    By Henry Wadsworth Longfellow


    The tide rises, the tide falls,
    The twilight darkens, the curlew calls;
    Along the sea-sands damp and brown
    The traveller hastens toward the town,
    And the tide rises, the tide falls.

    Darkness settles on roofs and walls,
    But the sea, the sea in the darkness calls;
    The little waves, with their soft, white hands,
    Efface the footprints in the sands,
    And the tide rises, the tide falls.

    The morning breaks; the steeds in their stalls
    Stamp and neigh, as the hostler calls;
    The day returns, but nevermore
    Returns the traveller to the shore,
    And the tide rises, the tide falls.




    답글
    • 숲지기2018.09.05 17:18

      파도소리가 철썩 들리고 수위가 높았다가 낮아졌다 하는 가운데 브리티쉬 악센트의
      중저음의 바리톤 남자가 저 시를 나직이 읊는 상상을 합니다.

      운율이 완전 노래입니다.
      하하 아쉬운 김에 제가 목소리 굵게 해서 낭송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The day returns, but nevermore~
      수첩에 적었다가 뭘 말해야할 자리에서 써먹을까도 생각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노루님,
      이런 시 또 소개해 주십시오 ㅎㅎ

  • 파란편지2018.09.08 13:54 신고

    이영광 시인의 "무인도"는 너무나 강렬해서,
    정호승 시인의 "여행"도 직접적으로 마음을 흔들어서
    누가 골라보라고 한다면 맨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이영광 시인은 "사랑의 미안"이라는 시에서

    얼굴을 감싸쥔 몸은 기실 순결하고 드높은 영혼의 성채
    울어야 할 때 울고 타야 할 때 타는 떳떳한 파산
    그 불 속으로 나는 걸어들어갈 수 없다
    사랑이 아니므로, 나는 함께 벌 받을 자격이 없다

    고 한 걸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주제넘지만 제 이야기를 한 것 같았습니다.
    여행........
    저는 맨 처음 바다를 보고 필시 제 가슴, 갈비뼈에 금이 갈 게 뻔하다고 느꼈고
    그러면 뭐 어떠랴, 병원에서 고칠 수 있겠지 싶었습니다.
    '여행' 하면 평생 그 생각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답글
    • 숲지기2018.09.08 14:31

      옮겨주신 시구절도 만만치 않지만
      뒤에 쓰신 교장선생님의 즉흥 댓글이
      한편의 작품입니다

      '여행........
      저는 맨 처음 바다를 보고 필시 제 가슴, 갈비뼈에 금이 갈 게 뻔하다고 느꼈고
      그러면 뭐 어떠랴, 병원에서 고칠 수 있겠지 싶었습니다.'
      시는 교장선생님께서 쓰셔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쓰신 댓글이라도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 파란편지2018.09.08 15:10 신고

      ㅎㅎ~
      아마도 어머니께서 저에게 작은 가슴을 물려주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 일들이 그 바다, 그 너른 모습, 그 가득함, 그 차올라서 울렁거리는 물결 같은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며 지냅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게 다 어긋나기 마련이었습니다.

    • 숲지기2018.09.09 22:30

      그 자세를 본받고 싶지요 저는.
      "세상 일들이 그 바다, 그 너른 모습, 그 가득함, 그 차올라서 울렁거리는 물결 같은 것으로" 만지고 느끼심이 부럽습니다.
      거의 매사에 어긋나는 건 저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요.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11.01
10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10.01
8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8.01
7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7.01
6월 초하루 시편지  (0) 2018.06.0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