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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110)
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9월 /이기철 무언가 하나만은 남겨놓고 가고 싶어서 구월이 자꾸 머뭇거린다 꿈을 접은 꽃들 사이에서 나비들이 돌아갈 길을 잃고 방황한다 화사했던 꿈을 어디다 벗어놓을까 꽃들이 제 이름을 빌려 흙에 서명한다 아픈 꿈은 얼마나 긴지 그 꿈 얼마나 여리고 아픈지 아직도 비단벌레 한 마리 풀잎 위에 영문 모르고 잠들어 있다 나뭇잎이 손가락을 펴 벌레의 잠을 덮어주고 있다 잘못 온 게 아닌가 작은 바람이 생각에 잠긴다 급할 것 없다고, 서두르지 말라고 올해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바람에 씻긴 돌들이 깨끗해진다 여름이 재어지지 않는 큰 팔을 내리고 옷이 추울까 봐 나뭇잎을 모아 제 발등을 덮는다 컴퓨터 속의 학교 /권영하 기다리던 개학을 했다 가방 대신 아이디와 비번을 들고 컴퓨터 속으로 등교를 했다 올해는 어떤 ..
웹소통 /최성아 무리에서 멀어지는 걸음을 조율할 때 벗어난 물줄기만큼 흔적 냅다 지운다면 천 갈래 바다로 가는 강의 약속 아니지 온라인 문을 열다 색다른 계단 만날 때 읽고 싶은 댓글 찾아 한쪽만 오르내리면 사방을 두루 감싸는 바람길을 못 보지 화풀이 생각 늪에 빠져드는 날이거든 편 모아 술렁대는 불길 솟는 날이거든 돋보기 클릭 속으로 흐린 눈을 닦는 거다 크레바스에서 /최정희 깊이일까, 높이일까 까마득한 얼음 절벽 막다른 길 위에서 갈 길을 묻는다 균열된 발밑의 바닥 흔들린 생의 지축 내려가야 하는 걸까 올라가야 하는 걸까 실패한 꿈들이 빙벽 속에 갇혀 운다 햇살에 녹아 흐르는 새하얀 빙하 조각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차갑고도 뜨거운 길 꿈꾸는 가슴이 있어 나 지금 살아있다 별빛은 어둠 속에서 돌올하게..
여름 장마 /이병률 미안하다고 구름을 올려다보지 않으리라 좋아, 라고 말하지도 않으리라 그대를 데려다주는 일 그대의 미래를 나누는 일 그 일에만 나를 사용하리라 한 사람이 와서 나는 어렵지만 두 평이라도 어디 땅을 사서 당신의 뿌리를 담가야겠지만 그것으로도 어려우리라 꽃집을 지나면서도 어떻게 살지? 좁은 골목에 앉아서도 어떻게 살지? 요 며칠 혼자 하는 말은 이 말뿐이지만 당신으로 살아가리라 힘주지 않으리라 무엇이 비 되어 내리는지도 무엇으로 저 햇빛을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공기만으로도 살아가는 공기란(空氣蘭)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았으니 당신으로 살지는 않으리라 물 없이 흙도 햇빛도 없이 사람 없이 나는 참 공기만으로 살아가리라 ―계간 '시와 표현' 2012년 가을호 칸나가 피는 오..
미래를 추억하는 방법 /이대흠 꽃이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름을 묻고 직업을 묻고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고 꽃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꽃이 사는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꽃을 볼 때마다 바닥을 봅니다 당신의 바닥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입니까 허공에 집을 지어 놓고 바닥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닥이 절망을 선물한 것이 아니라 허공에 바닥을 그려놓은 게 문제입니다 공기의 명랑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꽃향기가 개울을 이룬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바닥에 등꽃이 핀 저녁이었습니다 당신의 발가락은 꽃잎 끝처럼 순했습니다 향기의 또랑이 가슴속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연습하지 않아도 우리는 절망을 치러야 합니다 등꽃의 꽃말을 놓고 우리는 서로의 눈빛을 꼬았습니다 이별을 짓기 위해서는 ..
붉은 욕이 피는 오월 /박미산 꽃들은 여전히 피어 하늘을 날고 있는데 그녀들의 대화는 자꾸 발밑으로 미끄러진다 나는 플라토닉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의심에 가득 찬 너의 눈빛은 끈적끈적하다 나는 바다를 말하고 있는데 큰 파도 소리를 담은 너는 모진 혀를 놀린다 너는 향기 넘치는 프리지어를 보고도 노란 히스테리와 구겨진 비명을 한 묶음 담아 나에게 던진다 어제의 사월을 긴긴 시간 탐문하던 너는 풀 한 포기 키울 수 없는 너의 사랑을 마구 뱉어낸다 사월의 끝을 지나 오월이 온다 시를 모르는 사랑을 모르는 장미가 가시마다 붉은 욕을 주렁주렁 매달고 시와 사랑 사이 미묘한 경계에서 발을 헛딛으며 자신을 찌른다 ㅡ모던포엠 2020, 5월호 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권혁웅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계..
올해의 사순절 /마종기 젊었던 날에는 봄 햇살이 더 밝았다. 밝아서 모든 게 잘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아무데나 누었다. 밤이 되어도 초목은 잠들지 않고 우리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작 우리는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해 어디에 누워도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운 곳은 다 변해 버렸다. 이마에 재를 받은 옛 모습의 몸은 모두들 떠난 것을 이제야 눈치 챈다. 왜 세상이 창백하고 추운지를 배운다. 식물도 기억력이 있다는 중얼거림 속에 숨어서 내 독백을 들어주는 이가 언제부터 주위에 있다는 걸 느낀다. 외로울 때는 오히려 더 혼자가 되어 언 땅에 머리 놓고 취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입 안 가득한 목마름은 무엇인지 목이 마르지 않으면 멀리 볼 수가 없으니 다음 생이 기다리는 것도 볼 수 없으니..
부추전 /유종인 삼월 삼일날 부추전을 부친 건 어느 혁명의 소사(小史)에도 없는 일, 그럼에도 당신은 오후 4시와 5시 사이에 이 심심한 거사를 부쳐내서는 희고 큰 한 접시 우주에 담아 내놓는구려 야생의 풋것들을 대신하듯 아마 비늘의 궁전에서 모든 아랫도리가 칼을 받아 나온 것들이 이렇게 호주산 밀가루에 버무려 거뭇거뭇 탄 데도 훈장처럼 갖추고 나온 것이 오늘 하루 글이 없는 나를 은근한 사람으로 부추기는구려 당신과 마주 앉아 침묵이 더 자주 젓가락질로 전(煎)을 찢어내는 사이, 세상은 그만큼이나 갈라졌던 국경을 붙여 조금씩 너른 나라로 나아갈 일은 없는가 나는 부추전을 찢어 먹으며 홀로 생각하는구려 더 시들기 전에 어떻게든 구워낸 부추전, 더 파장(罷場)에 들기 전에 마음은 선뜻 어떤 연애의 초록을 뜨..
문득, /허수경 새싹은 어린 새의 부리처럼 보였다 지난 초봄이었다 그리고 겨울은 왔다 억겁 동안 새들과 여행하면서 씨앗은 새똥을 닮아갔다 새똥도 씨앗을 닮아갔다 붉어져 술이 든 겨울 열매를 쪼면서 아직, 이라는 시간 속에 걸린 잎사귀를 보면서 문득, 새들은 제 깃털을 잎사귀 모양으로 바꾸었다 그 일이 억겁의 어디쯤에서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얼음 눈빛으로 하얗게 뜨겁던 겨울 숲을 걷던 어느 날 그 열매의 이름을 문득, 알고 싶었다 새들이 잎사귀를 아리게 쪼다가 잎사귀 모양을 한 깃털을 떨구고 날아간 문득, 숱이 두터운 눈바람 속, 새이던 당신에게 날개의 탄생을 붉게 알려준 그 나무 열매의 이름이 알고 싶었다 ― 시인수첩 2014. 봄 내가 생각하는 것은 /백 석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나 푹석한 밤..
붕어빵 아저씨 /강준철 붕어빵 아저씨가 붕어빵을 뒤집고 있어요. 오,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고소한 혁명! 세상도 뒤집어야 골고루 잘 익고 완성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뒤집을 땐 아저씨처럼 번개같이 뒤집어야 해요. 보셔요! 미의 여신이 모나리자를 뒤집고, 수련은 미의 여신을 뒤집고, 해바라기가 수련을 뒤집고, 아비뇽의 처녀들은 해바라기를 뒤집고,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뒤집고 브릴로 상자가 샘을 뒤집지 않았어요? 그 때마다 새로운 꽃들이 피고 사람들이 뒤집어졌지 않아요? 그리고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뒤집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뒤집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베이컨에게 뒤집히고, 베이컨은 데카르트에게 뒤집히고, 데카르는 칸트에게, 칸트는마르크스에게마르크스는베르그송에게베..
무심풍경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