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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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2. 6. 1. 00:38

고도를 기다리며

​/황명덕

보아뱀 뱃속에 갇힌

아기코끼리는

얼마나 큰 소리를 질렀을까

고도를 기다리며

뱀의 아가리는 닫히고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점점 녹아드는 통증에

고도는 올 것인가

마침내 올 것인가

한 점 빛도 보이지 않는

솔잎 같은 칼바람

언 손등을 핥고 지나가는 밤

고도는 올 것인가

보아뱀 뱃속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아기코끼리처럼

- 시집 ´대청도 바람일기´ 리토피아, 2022

 

 

 

 

 

불편
/이명윤

물끄러미가 나를 보고 있다

버스를 타도 물끄러미
커피를 마셔도 물끄러미

어느 날 시장에서 졸졸 따라와

나의 허공을 떠나지 않는다

우럭과 가자미 몇 마리

손질을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무 몇 개 상추 몇 단
단출하게 바닥에 놓고 앉은
노파의 눈 속에 사는 물고기,

오래된 호수가 품은 내력인 듯

길고 긴 꼬리를 가진 물끄러미가
천천히 지느러미를 흔들며 내게로 왔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를

직접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눈을 감았다 떠도 꿈쩍 않고

컴컴한 저녁이 되어도 도무지
제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지독한 물끄러미,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날부터

눈 속 어항에
늙은 물끄러미 한 마리를 기르게 되었다

 

 

 

 

 

책 수선공

​/오정국

어떤 책은 점토판의 얼굴 같다 무덤처럼 고요하다 거기, 스피노자의 안경알이 놓여 있다 빛을 여읜 눈의 꿈과 망각, 창백한 재*가 흩어져 있다 그 어느 도서관의 골방인가, 머리카락을 재 가루처럼 흩날리는 사내, 이마의 주름살에 물과 불과 흙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죽은 자의 기억이 책장 귀퉁이를 떠나지 않는다 밑줄과 얼룩, 손 글씨의 흉터가 가득하다 가지런한 쉼표들, 그쯤에서 발을 멈춘 숨소리가 들릴 듯하다 마침표의 검은 돌멩이는 빈틈없이 제 자리에 박혀 있다 세상(世上)을 뒤집으면 책(冊)이 되고 책을 펼치면 세상이 되는 상형문자들

벽시계의 톱니바퀴는 무한대의 시간을 철컥거리고 누군가 걸어간 사막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발자국에 담긴 일몰이 서가를 비춘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측량기사 K**는 오늘도 성문 밖을 떠돈다 KKK단의 횃불이 타오른다 살인청부업자 K가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는데,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이는 이야기가 멈춰서질 않는다

*보르헤스의 「축복의 시」 인용.

** 카프카의 장편소설 성(城)의 주인공.

​​

- 현대시 2022, 5월호

 

 

 

 

 

.....................................

 

...... 위의 3편 시는 각각의 독백으로 읽히고

물컹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옆에 와 있기도 하다.

사무엘 베케트와 세인트 엑쥬베리, 프란츠 카프카 까지 독특한 향기를 지닌 이름들은

마치 그들의 동네에 오래 세들어서 살아온 듯 익숙하다.

젊은 날 곱씹던 그들의 글귀는

꽤 괜찮은 단골 안주가 되어 맥주잔을 기울게 했지. 

해외살이 시작으로 감정을 동여매면서

나는 독해졌을까.

 

....... 사진들은 지난 일요일 안드레아를 만나러가는 길에 찍었다.

매 계절마다 느낌표를 바꿔 입는 저 들판으로 우리는 말하고 있었구나.

 

....... 기다렸던 6월이다. 

 

...... 향기로운 이름들

Samuel Barclay Beckett

Antoine Marie Jean-Baptiste Roger de Saint-Exupéry

Franz Kafka

Friedrich Wilhelm Nietzsche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Theodor Wiesengrund Ado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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