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4월 초하루 시편지 본문

책상서랍/초하루 시편지

4월 초하루 시편지

숲 지기 2022. 4. 1. 01:23

빌뱅이 언덕

/이정록

 

 

더는 갈 데 없을 때

막다른 내가 몰래 찾는 곳이 있다

호리병처럼 한숨만 삐져나올 때

몸의 피리소리가 만가처럼 질척거릴 때

더러운 자루를 끌고 가 주저앉히는 곳이 있다

일직교회나 조탑리 쪽에서 다가온 바람이

오래전부터 쿨럭거리던 목구멍을 지나

멍 자국 가실 날 없던 어깨와 등뼈를 지나

회초리 자국 희미한 종아리 아래 뒤꿈치에 닿으면,

편석 사이에서 솟구치는 돌칼 바람이

내 헐벗은 자루 속 곰팡이를 탁탁 털어준다

네가 아픈 것은 눈물이 말랐기 때문이라고

밤새 날아가는 새는 늘 눈망울이 젖어있다고

빌뱅이 언덕이 편경 소리로 깨우쳐준다

 

밟힐 때마다 노래가 되어라

함께 울어줄 곳을 숨겨두지 않고

어찌 글쟁이를 할 수 있으리오

혼자 울고 싶은 곳을 남겨두지 않고

어찌 몽당분필을 잡을 수 있으리오

빌뱅이 언덕, 부서지고 미끄러지는

돌멩이 틈에 눈물을 심지 않고

 

- 시인시대 2022, 봄호

 

 

 

 

 

 

무덤

/복효근

 

더 이상

덤이 없는 곳

 

그러니까

이생은 덤이라는 뜻

 

 

- 시인시대 2022, 봄호

 

 

 

 

 

 

 

익명의 안부

/김지헌

 

그녀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와

이젠 익명의 안부가 되어버린 뒤늦은 말들

준비도 없이 다른 별로 이주하듯

누군가의 파일이나 전화버호부에서 삭제된다는 것

잠시 몇 생의 이름이 호명되다가 곧 잊힐 것이다

 

파일을 뒤져 수신확인을 해본다

그녀는 정확히 8시간 52분 후에 나의 답 메일을 확인하였고

잠시 안도하였으리라

그녀의 마지막 유산이었던 파일 속 짧은 시 한 편

그저 조금 앞서서

건널목 이쪽에서 저편으로 길을 건넜을 뿐인데

 

누군가 빈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리겠지

슬픔은 짧게 토막 치다가

곧 발길을 돌릴 것이다

짧은 조문을 마치고 나면

잠시 정원의 마른 잎사귀를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차가운 바다에 그물을 던질 것이다

 

 

- 열린시학 2022, 봄호

 

 

 

 

 

 

..............................

 

* ...... 농담으로 시작하는 달 4월(만우달)이다.

추웠던 몇 달을 지나

농담인듯 4월이 왔다는 말일까.

 

덕분에 시 몇 편 감사히 읽는다.

 

* ...... 사진은 목련이 핀 운 좋은 날

핸드폰에 담았다. 

 

 

 

 

 

 

 

 

댓글 11

  • Chris2022.04.01 03:02 신고

    "덤 없는 무덤"
    참 절묘한 언어의 마술입니다.
    오늘의 시는 전반적으로 톤이 좀 어둡고 무거움을 느낍니다.
    봄볕 듬뿍 받고 행복기운 받으십시오.
    이곳은 어제 눈발이 펄펄 내렸습니다. ㅠㅠ

    답글
    • 숲지기2022.04.01 21:51

      프랑크푸르트 큰 도시에 갔다가 방금 왔는데,
      그곳엔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크리스님 혹시 차에 색깔카드 붙이는 것, 아세요?
      오염가스 배출 정도에 따라 색을 나눠서 붙이는 겁니다.
      다른 곳에도 있는지 유럽에만 있는지 정말 모릅니다 저는.
      암튼 제 차는 초록카드가 붙었는데, 프랑크푸르트엔 하늘색 차라야만 시내를 활보할 수 있다 합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오늘 저는 운전하지 않고 ICE를 타고 도시에 갔습니다.
      기타역에서 연착한 기차 기다리느라 동태가 되는 줄 알았고요.

      시가 어둡다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잠시 효력이 있을 뿐인 진통제 같은 혹은 기쁨조 같은 시는 이 봄에 읽고싶지 않네요.

    • Chris2022.04.02 03:00 신고

      캐나다에는 아직 그런 제도가 없습니다. 탄소배출량 제한에 대해서는 유럽이 아주 강한 정책을 펴는 것 같습니다. 저는 찬성. 정작 가장 앞장서야 할 나라는 미국, 중국인데... 서로 자기 이익만 챙기는 동안에 바닷물이 가슴까지 차 오름을 느낍니다.
      요즘 제 글이 좀 각지고 뾰족함을 느낍니다. 노인 심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고, 갱년기라 하기에는 조금 쑥쓰럽고.. 사춘긴가? ㅋㅋ [비밀댓글]

    • 숲지기2022.04.02 12:27

      시기가 시기인 만큼요.
      여행지에선 웃는 얼굴만 봤는데
      독일엔 찌푸리고 불만스런 얼굴들을 봅니다.
      꽉 죄는 느낌이고요,
      보이지 않는 눈들에게 감시당하는 듯 하고요.
      유해가스 배출에 대한 이해에 앞서
      이 옥죄는 듯한 정책에 불만이 큽니다.
      이렇게 해서 얻는 것보다 어제 차없이 칼바람 추위에 돌아다닌 후유증이 더 아프고요. [비밀댓글]

  • 파란편지2022.04.01 03:58 신고

    이정록의 시는
    이 삶이 좀 누추해도 괜찮다는 듯해서
    고마웠습니다.
    그렇지만 글쟁이도 아니고
    몽당분필도 없어서
    낯설게 되었습니다.
    저 도도한 아픔과 그 정신을
    제것인양
    흉내낼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답글
    • 숲지기2022.04.01 21:56

      글맛이라고 할까요, 비유가 워낙 탁월한 시인이라서
      이분 이름의 시는 발견하는대로 다 읽습니다.
      어떤 것엔 적절하고 또 어떤 것엔 넘치는가도 싶지만,
      이만한 시를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 파란편지2022.04.02 07:02 신고

      저도 이 시 감상을 저렇게 쓰긴 했지만
      만약 전반부만 있다면 쓸데없는 시가 되었겠지요.
      후반부가 있어서 펄펄 살아 있게 되고
      저 같은 사람도 그 시퍼런 기상을 부러워하겠지요.

    • 숲지기2022.04.02 12:20

      지금 4월인데, 여긴 돌칼바람이 붑니다.
      뿐만 아니라
      돌칼바람이 눈발을 이리저리 몰고 다닙니다.
      이런 날 이 시를 다시 읽으니
      '어깨와 등뼈를 지나 종아리까지'
      울림이 옵니다.
      이런 날씨를 알고 고른 것도 아닌데,
      전반부를 읽고,
      후반부를 더어번 더 읽습니다.

  • 노루2022.04.01 17:15 신고

    무덤과 익명의 안부 사이
    말 없이 하늘과 눈맞춤하고 선
    상큼한 저 시가 좋으네요. ㅎ

    답글
    • 숲지기2022.04.02 12:12

      저 건물 안에 도서관과 작품 영화 상영관 있습니다.
      원래도 건물이 예쁘지만
      뜰에 목련이 필 땐 홀딱 반할 정도입니다.
      올린 꽃 핀 날짜에 딱 맞춰서 그 아랠 걸었습니다.

      무덤이 참 무서운데,
      시 읽고 좀 나아집니다.

  • style esther2022.04.06 02:15 신고

    목련꽃 그늘아래서
    베르테르의 시를 읽노라…
    딱 그런 분위기예요.
    덕분에 매달, 참신한 시를 읽어봅니다.

    여기도 예년에 비해 아직 싸늘해서
    여전히 겨울옷 입고 다니는데
    오늘 문득 옷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4월, 그런 4월….

    답글

'책상서랍 > 초하루 시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6월 초하루 시편지  (0) 2022.06.01
5월 초하루 시편지  (0) 2022.05.01
3월 시편지, 조지아 시인들 시  (0) 2022.03.07
2월 초하루 시편지  (0) 2022.02.01
2022년, 정월 초하루 시편지  (0) 2022.01.0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