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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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5. 5. 1. 21:46

독일 어느 동네 한복판에 세워진 오월의 나무* 

 

지금은 어떤 음악 속에

 / 문태준

오늘은 밝고 고요한 흰 빛이 내리시니

화분에 물을 부어주고

멀리 가 있는 딸의 빈방을 들여다본다

일곱살 딸이 작은 방에서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다

그래, 지금은 어떤 음악 속에 있다

뒷숲에는 잎들이 지고

거실에는 어제의 식구들이 수런거리고

탁자 위 돌, 조개껍질, 인형은 눈을 감고

나는 씌어지지 않은 백지를,

백지의 빛을 책상 위에 가만히 펼친다

문장이 백지 위에 어리고 움직인다

희미하고 물렁물렁한 감정을 갖고서

내 옆에는 한 컵의 투명한 물이 있고

그 옆에는 허물어진 그림자가 있고

노랗게 익은 모과는 향기를 풀어내고

때때로 떨어진 잎들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누군가 문밖에서 나를 불러

흰 빛 속에 잠시 나를 들어올린다

-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

 

 

 

4월 마지막 날 저녁, 오월의 나무를 세운 뒤 마을회관 앞에서 동네 축제가 시작된다. 나 빼곤 모두 이 동네 사람들 

 

 

꽃이 무거운 꽃나무여

/ 장석남

꽃나무는 심어놓고

잊었더니만

어느날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첫 꽃 핀 꽃사과여

그 꽃의 중량을 가늠해보니

세상에 와서 처음 업어보는 연인의 무게만 하겠네

상기된 미소, 그 무게만 하겠네

숨이 막히도록 무거운 피어남들

꽃이 무거워 가지가 휘는 작은 꽃나무여

꽃 떨구고 하늘로 솟을라나?

혼이 난 김에 아주 솟아 갈라나?

숭굴숭굴한 진자줏빛 무게여

꽃의 무게로 일생이 휘는 일이여

- '내가 사랑한 거짓말' 창비 2025

 

 

 

이날 새로 알게 된 지인들. 내가 초대 받은 곳은 주말농장 그룹의 테이블, 리타가 속해있는 모임이다. 리타는 절친 유타의 또 다른 절친. 리타는 이 동네 방앗간집 맏며느리. 

 

착한 밤 

/ 전윤호

아무도 거짓말하지 않는 착한 밤입니다

지하주차장 가득 찬 겨울

노숙하는 자동차 위로 불꺼진 창들

아무도 울지 않는 착한 밤입니다

어둠이 두려워 노래 부르며 걷습니다

늙은 권투선수처럼

이번에 넘어지면서 다시 못 일어나겠지요

왜 추울수록 별이 더 잘 보일까요

북한강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아직도 끝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자작나무숲 지나 어디쯤에선가

길 잃고 동해를 만나지요

마지막 잔은 남기고 외투 걸치는 사람 위해

갑자기 안개 깨어나고

실패가 두렵지 않은 착한 밤입니다

-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2020

 

 

 

오른쪽 왼쪽 앞에 보이는 건물까지, 지방 보호 유산으로 지정된 리타 시아버지의 방앗간 

 

 

초승달이 올려진 건물 역시  중세 때 건축되어 대를 이어 지금도 사용 중인 방앗간 부속건물 중 하나이다.

한해 두어 번 씩 외부에 공개하는 날, ... 그 뭐라나.... 갑자기 단어 생각 안남....

방앗간의 역사와 기술적 변천을 설명해주는데....

여러 번 초대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일이 있어서 아쉬워 하다가 '오월의 나무 세우는 날' 을 계기로

겨우 방문을 하게 되었다. 

 

 

 

 

 

..... 제주도에서 돌아온지 보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그곳의 풍경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 그래 지난 2주간, 네 번의 생일잔치가 있었고 두 번의 장례식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정확히 같은 단위로 주어지는 촘촘히 짜내려가는 직조와 같다고 여겼던 생에 대해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  사진은 오월의 나무를 세운 날 전경이다.

17세기 즈음 시작된 '오월의 나무( 세우기)' 는 곡식의 싹이 잘 나서 건강히 성장하고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사람들이 협동하여 울긋부긋 장식을 한 오월의 나무를 세우고

그 주변에서 춤을 추는* 남쪽 독일의 오랜 전통이다.

퇴근을 하고 서둘러 갔지만 오월의 나무가 세워지는 의식이 다 끝난 뒤였다.

..... 하루에 한번도 블로그에 들어 오지 않은 나날이 늘어간다.

이러다가 아주 안(못) 올 수도 있겠다 싶다.

찾아주신 분들과 시 써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오월의 나무 Maibaum

*오월의 춤 Tanz in den M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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