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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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읽는 시

숲 지기 2025. 9. 1. 22:06

 

 



여름은 여름을 지나 어디로 가는 걸까

​/이기철

그 큰 걸음걸이로 여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소다수 아이스박스 길게 줄 선 휴게소와 주유소를 지나

익는 일에만 골똘한 자두 복숭아 오디의 해안도로를 지나

곤줄박이 눈썹새 노랑할미새는 숲으로 날고

물봉숭아꽃 피어 행복해하는 마을을 지나

여름은 큰 팔을 저으며 산을 넘어온다

소란을 떠는 천둥, 군집으로 몰리는 소낙비

나는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두 개의 모롱이를 돌아 우체국으로 간다

여름엔 아프지 말라는 편지를 짐받이에 싣고

슬픔이 없는 풀꽃들이 잎을 반짝인다

풀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이젠 잊힌 이름들은 그냥 잊어버리려 한다

이젠 초조하게 내일을 기다리지 않으려 한다

조그맣게 사는 삶이 좋아졌다

끝없이 구석으로 몰리는 마음 하나로 견디는 날엔

눈부신 삶 같은 건 죄 내려놓겠다

쑥갓꽃 부추꽃을 지나

유등연지 가득한 연꽃을 지나

여름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저 혼자 어디로 가는 걸까

​- 계간 '시와소금' 2025 가을호

 

 

 

 

AI-플랫폼 1 
/ 이인철

양자컴퓨터에 내 뇌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달리는 말에도
기계인간에도
미루나무에도
행성을 날아가는 새에도

내 뇌는 통합된 분리다

듣고 느끼고 달리고
같은 순간에도 다분화된 오감으로 절정을
느끼는 나
같은 시간에 여러 가지를 판단하고
여러 나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또 다른 나들을

- 'AI 인류' 여우난골 2025

 

 

 

 



노을
 

/ 기형도

하루종일 지친 몸으로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

친구가 다녀갔다

나보다 예닐곱살 덜 먹은 한국여인,

깍듯이 언니라 나를 칭하는 그녀, 함부로 친구라고 여기는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이 구석진 곳까지 클릭할 리가 없겠지 하하.

세상이 좁다지만 여전히 넓은 미지의 세계에 한알 모래로 나는 살고있으니까.

아주아주 오랫만에 우리말 수다를 떤 기분이, 그 뭐랄까 국가공휴일 같았다. 

사진의 채소바구니는 그녀를 위해 담은 것이고, 그 배경은 정리 안된 내 가든. 

 

....

9월이다.

마음 같아선 7월을 몇달 더 살고 싶었지만 9월이야.

 

안구건조증의 침침해진 눈으로 자판을 누르다 보니 

반드시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외엔 자꾸 미루게 된다.

살다살다 눈의 눈물주머니가 고장 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이 아려서 한쪽 실눈 만을 뜨고 자판을 누르는데

이게 또 불편을 감수하며 사는 분들을 더 이해하게 되네.

 

....

이 글을 읽는 분들, 이 글을 읽지 않는 지구의 더 많은 분들,

제발 아프지 마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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