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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흑림(Blackforest)에 살으리랏다
정월 초하루에 읽는 시 본문

폭설 도시
/ 문정희
폭설이 도시를 점령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첫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되었다
반짝이는 시간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새의 깃털 소리가 났다
하얀 손을 가진 이 통치자는 누구인가
그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건 적도 없지만
역사상 어떤 만장일치로 세운 정부보다 빠르게
눈부신 풍요를 온 도시에 선물했다
그러나 이 꿈의 도시는
짧은 생몰 연대를 기록하고
미완의 혁명으로 곧 사라질 거라는
댓글이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도 전에
화려한 몽상은 실체를 드러냈다
이 도시의 율법은 백지, 그러므로
누구도 법을 어길 일이 없어 좋았다고
아쉬워하는 젊은이도 있었다
보기 좋게 나자빠져도 법이 없으므로
죄도 벌도 없었다
제 길을 제가 만들어 가면 그뿐인
이 설국을 구상한 이는
정치가가 아니라
분명 시인이었을 것이다
조급증처럼 자동차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유언비어 사이를 질주하는가 싶더니
하얀 풍요의 도시를 순식간에 파괴해 버렸다
- 문정희 '다산의 처녀' 민음사 2010

바다는 얼마나 많은 파도를 낭비했을까
/김기택
몇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쓰지 않는데도 뭔가 계속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등은 손 닿지 않은 가려움을 쓰고
아홉 구멍은 가려운 줄 모르는 가려움을 쓰고 있었다
창문은 햇빛과 비와 어둠을 쓰고
감자와 양파는 창고 안에서 싹을 쓰고 있었다
안 쓰면서도 쓰는 시간이
정수리 머리카락을 잡아 뽑고
수염과 비듬과 주름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길은 그동안 쓴 발자국을 하나도 지우지 않은 채
그 위에다 또 발자국을 쓰고 있었다
햇살은 거실에서 반짝이는 먼지를 쓰고
구석과 틈새는 이름 모를 벌레들을 쓰고 있었다
쓰지 않는 동안 무진장 흘려보낸 것들이
다 시가 될 것 같았다
쓰자마자 사라지는 휘발성은
하늘에다 푸른 가지를 흔들며 바람을 쓰고 있었다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눈을
해서는 안 될 말에 담아 무덤까지 지고 갔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아파트 공사 나는 바람에 거리로 풀려나와
바람에 부푸는 현수막과 찢긴 포스터를 쓰고 있었다
거리에 나뒹구는 전단지를 쓰고 있었다
깨진 유리창을 악착같이 이어 붙이는 테이프를 쓰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휴대폰 보느라 꺾인 목을 쓰고 있었다
몸 구석구석 간지럽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시는 사라지기 위해 계속 나아갔다
바다는 끊임없이 파도를 쓰고 지우고
더 격렬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쓰고는 다시 지웠다
구름과 밤과 여명과 노을을 공들여 쓰고 나서
하늘은 새파랗게 비어 있었다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며 무진장 시를 낭비하고서
갈봄 여름 없이 꽃과 잎을 낭비하고서
한겨울이 되자 땅은 또 엄살떨었다
몇 달 동안 풀 한 포기도 쓰지 못했다고
- 계간 '문학과 사회' 2025 겨울호

방명록 2
/ 김경미
나는 왜 극장처럼 어두워서야
삶이 상영되는 느낌일까
극장 매점의
팝콘처럼 하얗고 가벼운
나비 같은 생은 어떤 감촉일지
가끔씩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병아리 깃털이나 잎일 수 있는지
후, 불어보고 싶어진다
- 김경미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1

.......
....망년날까지 정신없이 바빴다.
유년시절의 습관*대로 한해 마지막 날엔 거나하게 목욕제계 하리라 단단히 마음 먹고
온천도시 바덴바덴으로 갔다.
그러나 독일은 한해의 마지막 날엔 거의 모든 가게나 사업장이 문을 닫거나 오전에만 개방,
인터넷 뒤져서 늦게까지 개장하는 온천장을 미리미리 알아뒀었다.
아우토반을 나와 바덴바덴 시가지로 진입하는데,
늦은 오후 햇살을 받은 성곽이 숲언덕 가운데 솟아 있다.
힐끔힐끔 보다가 운전대를 틀었다, 온천장이 아닌 저산 꼭대기로 가자!
뼈대만 남아 텅 빈 옛 성곽이 나를 맞았고,
몇분 뒤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우루루 올라왔다.
한해의 마지막 석양
그 왼쪽 칼바람이 부는 귀퉁이 하늘엔 낮달이 토실토실 살을 찌우고 있었다.
....사진들은 조금 전, 그러니까 새해가 되기 불과 예닐곱시간 전의 석양 풍경
고대 로마의 유적이 흔한 흑림 온천도시 바덴바덴의 어느 산 꼭대기 에버슈타인유적지에서 찍었다.
....시쓴 분들께, 그리고 댓가없이 가져왔음에도 감사하며
이 글 클릭하신 모든 분들께 2026년 행운의 한해가 되길 기원드린다.
*대가족이었던 유년의 섣달그믐엔 구성원 모두 목욕을 했다.일종의 불문율이었다.
